• [서소문 포럼] 정순신의 ‘현재형’ 한동훈의 ‘등’

    최현철 사회 디렉터 정순신 변호사가 국가수사본부장 임명 28시간 만에 낙마한 뒤 벌써 한 주가 흘렀다. 그 사이 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상정됐는데 ‘가결 같은 부결’이라는 보기 드문 결과가 나왔다. 그래도 온통 정순신에 쏠린 국민 시선을 돌리기엔 역부족이다.   그럴 만한 게, 이번 사태는 국민감정을 건드리는 요소를 두루 갖췄다. 우선 만인의 관심사란 점. 학교폭력은 학창 시절 본인 또는 친구들이 한 번쯤 겪었을 수 있고, 혹시 내 아이가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안이다. 둘째 권선징악의 전복. 피해자는 극단 선택까지 하는데 가해자는 전학 가 당당히 서울대에 합격했다. 셋째는 아빠 찬스. 전학 처분 피한답시고 대법원까지 소송을 벌였는데 배후엔 현직 검찰 고위 간부 아빠가 있었다. 그 아빠가 3만 수사 경찰을 지휘하는 국가수사본부장에 지원하며 학폭과 소송 이력을 숨겼다는 거짓말이 뒤를 잇는다. 마무리는 그런 사실을 걸러내지 못하는 부실 검증 시스템이 장식했다.   통렬한 반성, 진심 어린 사과라도 있었다면 씁쓸한 마음 누르고 다음 조치를 기다릴 텐데, 인선과 검증에 관계된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염장을 지른다.     ■  「 정순신 낙마 사태 후유증 계속 임명·검증 관계자 사과도 없어 국수본부장, 또 검사 출신 우려 」    서소문 포럼 대통령실의 첫 반응은 “상황을 매우 엄중히 보고 있다”(26일)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 “추천권자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윤희근 경찰청장의 발언은 무능과 무책임의 고백이다. 사실 추천권자인 경찰청장의 역할은 서류 전달밖에 없었다.   “아들이 국수본부장에 임명된 게 아니잖아요.”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의 엄호 발언은 적반하장의 끝판왕. 28일 검증 책임자인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이 “내 책임이 크고 피할 생각 없다”고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확인해 보니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같은 날 “정무적 책임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법무부 인사검증단의 상관이니 책임감은 느낀다는 것인데, 책임지겠다는 뜻인가란 질문엔 곧바로 “아니다”라고 잘랐다.   결국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게 된 정순신 본인의 해명은 더 압권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형으로 알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공직후보자 사전 질문서는 “본인 배우자 또는 직계 존비속이 원·피고 등으로 관계된 민사·행정소송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이 문항을 현재 있느냐는 뜻으로 해석했기에 “지금은 없다”는 의미로 답했다는 것. 이 와중에 조문을 분석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찾다니, 과연 ‘법 기술자’다운 풍모다.   그의 ‘현재형’은 한 장관의 ‘등’과 오버랩된다. 지난해 8월, 법무부는 검사의 수사 개시 대상을 법이 규정한 부패와 경제범죄에서 사실상 대부분의 주요 범죄로 넓힌 시행령을 내놨다. ‘경제범죄 등’이라고 쓰인 법 조항(검찰청법 4조)에서 ‘등’을 한껏 활용해 검수완박 법안을 무력화한 것이다. 시행령 쿠데타라는 비판에 한 장관은 “법률의 문언이 법률 해석의 원칙적인 기준임은 확립된 대법원 판례”라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순신 변호사의 사임 입장문도 우려스럽다. “수사의 최종 목표는 유죄 판결”이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많은 법률가들이 수사를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으로 보는데, 그에게 이런 가치 지향적 판단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일단 유죄 심증을 가지면, 증거가 나올 때까지 사돈의 8촌까지 탈탈 터는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는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   국수본부장은 경찰청장 바로 아래 직급이다. 청장 지휘를 받지 않지만,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수사 후엔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경찰 지휘에 익숙한 검사들에게 썩 매력적인 자리가 아니다. 실제 2년 전 초대 국수본부장을 공모할 때 검찰 출신은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검찰총장이 사임 후 곧장 대통령 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요직을 익숙한 측근들로 채웠다. 검수완박 법안은 사실상 무력화됐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수사가 계속되며 야당은 무력해진 상태다. 행정안전부 산하에 경찰국을 만들어 인사권을 장악했다.   남은 돌발 변수는 경찰의 수사권 정도. 혹시 예상치 못한 수사 결과를 들고나오면 골치 아프다. ‘김학의 사건’에서 충분히 경험한 바다. 만약 검사 출신 측근이 경찰 수사총책이 된다면 그 가능성도 차단된다. 정 변호사가 지원 동기로 밝힌 경찰의 수사역량 강화는 그냥 ‘수사(修辭)’일 뿐이다. 같은 이유로 다음 국수본부장도 검찰 출신을 임명할 가능성이 크다. 검찰공화국에 대한 우려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최현철 사회디렉터

    2023.03.03 00:42

  • [서소문 포럼] 김구의 소원

    김창규 경제에디터 대학 때 즐겨듣던 노래가 있었다. 독일 출신 미국 싱어송라이터인 잭슨 브라운의 ‘The LoadOut/Stay’라는 곡이다. 두 곡을 이어 부른 이 노래는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공연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곡이다. 그런데 가사 가운데 ‘리처드 프라이어(Richard Pryor, 1940~2005년)가 비디오에 나온다’는 내용이 있다. 리처드 프라이어가 누군데 노래 가사에 나오는지 궁금했다. 요즘 같으면 검색창에 이름만 넣으면 바로 알 수 있지만 당시엔 쉽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인명사전, 백과사전, 잡지 등을 뒤적인 끝에 그가 1960~80년대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스탠드업 코미디 대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 그가 1979년 공연한 작품이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돌던 적이 있다.     ■  「 세계 곳곳에 한류 열풍 불면서 한국어 학습, 중국 제치고 7위에 백범 “문화의 힘 있는 나라” 소원 K콘텐트 위한 융합 플랫폼 필요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문화 콘텐트는 시간뿐 아니라 공간을 초월해 영향을 준다. 먼 나라에서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에 즐거움을 줬던 사람이 이제는 MZ세대를 배꼽 잡게 한다. 요즘 한류 인기를 보면 폭발적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 얘기 정도로만 여겨지던 세계 1위 콘텐트가 쉴 새 없이 나온다. 넷플릭스에선 한국 콘텐트끼리 순위 경쟁을 하기도 한다. 미국의 월마트에선 K팝이 흘러나오고 영국 런던 한복판에선 ‘한류(HALLYU)’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 전시회에는 민요부터 K팝 흐름까지 전시돼 있고 MZ세대의 응원봉 문화도 소개한다. 일부 젊은 층 사이에선 K콘텐트를 모르면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 증후군까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오징어 게임’이 방영될 땐 ‘오징어 게임 본 척하는 법’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 덕분에 한국이라는 브랜드는 요즘 상한가를 치고 있다. 한글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보다 많다. 미국 CNN에 따르면 세계 5억 명 인구가 외국어 공부를 위해 사용하는 듀오링고 앱에서 지난해 한국어가 7번째로 많이 학습된 언어였다. 영어·스페인어·프랑스어 순이었고, 한국어 다음으로는 중국어가 뒤를 이었다. 전문가는 “한국어가 한류를 타고 세계의 소통 언어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예전에는 해외에서 교포 중심으로 소비되는 언어였다면 요즘엔 한류 영향으로 배우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디지털 시대에 맞춰 등장한 한국의 웹툰이 일본의 망가를 밀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2021년 일본의 망가 시장은 2650억 엔(19억 달러)으로 2.3% 줄어든 반면 한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웹툰 시장은 이미 37억 달러에 달하고 2030년에는 560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쯤 되면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듯하다. 김구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쓴  ‘나의 소원’에서 이런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불안하다. 순간의 열풍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한국을 세계 무대의 주인공이 되게 해 준 건 바로 거대 플랫폼이다. 넷플릭스는 아시아권에 머물렀던 K드라마를 세계인의 거실 앞으로 배달해 줬다. 미국 이외의 콘텐트가 필요했던 넷플릭스와 온라인 전환을 통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려던 한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한국 외에도 수많은 국가에 투자한다. 한류가 사그라지면 바로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릴 것이다. 방탄소년단(BTS)은 팬과 소셜미디어·유튜브 등을 통해 소통했다. 마치 몇몇 기업가가 창의적인 제품을 개발했는데 이를 독과점 형태의 유통회사를 통해 팔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아무리 창의적인 제품이라도 ‘슈퍼을(乙)’이 되지 않는 한, 시간이 갈수록 갑(甲)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거대 플랫폼 말고도 외국인이 한류를 온전히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융합된 플랫폼이 나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범이 소망하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려면. 김창규 경제에디터

    2023.02.28 00:55

  • [서소문 포럼] 올해 확실한 북핵억지책 마련을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북한은 지난 20일 청주와 군산 공군기지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600㎜ 방사포(단거리탄도미사일·SRBM) 2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전날 한·미가 북한의 지난 18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발사에 대응해 F-35A 스텔스 전투기와 B-1B 전략폭격기 등을 동원해 연합공중훈련을 벌인 데 대해 맞대응한 것이다.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군대의 최신형 다연발 정밀공격무기체계로서 적의 작전 비행장당 1문, 4발을 할당해둘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는 전술핵 공격수단”이라고 위협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SRBM에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경량화한 전술핵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는 시간문제다. 국방부는 지난 22일 국회 정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북한이 ICBM 발사 능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으며, 핵폭탄의 소형화·경량화를 위해 올해 중 7차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  「 북한은 올해 전술핵 실험 가능 윤 대통령, 동맹 70주년 맞아 미국 확장억제 실효성 높여야 」    지난 18일 평양국제비행장에서 발사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연합뉴스] 국방부는 지난 16일 발표한 ‘2022 국방백서’에서 북한의 핵물질 보유량이 플루토늄 70여㎏과 고농축우라늄(HEU) 상당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북한 플루토늄 보유량은 ‘2020 국방백서’보다 20㎏ 증가한 것이다. 미국 랜드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은 북한이 2027년까지 핵무기 200개, ICBM 수십 발과 한반도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 탑재 가능한 미사일 수백 발을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핵무기를 200개 이상 보유하면 비핵화 협상이 사실상 물 건너간다. 북한이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 협상으로 핵무기를 보유한 채 대북 제재 해제를 얻어내려 할 것이다. 미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은 지난해 12월 보고서에서 “북한은 억지력을 넘어 실행 가능한 전쟁·전투 전략으로 핵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에 있다”고 평가했다.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되며 국민 불안은 가중되고 있다. 최종현학술원이 최근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6%가 한국의 독자 핵 개발을 지지했다.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 핵 억지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51.3%, ‘그렇지 않다’고 답한 비율이 48.7%였다. 북한이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허용하지 않는 한 한국의 독자 핵 개발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의 승인 없이 핵 개발에 나섰다간 국제 제재 등으로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엄청난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국과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를 강화해 북핵 대응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한국 방위 및 확장억제 공약이 철통 같다며, 올해 개최될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등을 통해 확장억제의 실효성을 높일 방침이다. 확장억제가 북한 핵·미사일을 효과적으로 억지하고 국민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면 한국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북한 핵·미사일 위협을 받는 일본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신뢰하고 있다.   한·미는 오는 10월 동맹 70주년을 맞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동맹의 하나로 꼽히는 한·미 동맹은 한국의 안보와 번영을 뒷받침해 왔다. 올해 동맹 70주년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은 다양한 계기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날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윤 대통령이 오는 4월 하순 미국을 국빈 방문하는 문제가 협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생존이 걸린 북핵 대응은 최우선 의제가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미국의 확장억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이와 함께 미국의 사전 동의가 있어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20% 미만 저농축을 할 수 있게 한 한·미 원자력협정도 현실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한국은 이제 70년 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세계 10위권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에 걸맞게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당사자가 될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이 주창한 글로벌 중추국가(GPS)는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글로벌 무대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핵심 가치를 지키고 ‘같은 생각’을 가진 국가들과 연대해 행동할 때 실현될 수 있다. 한국이 제 역할을 하려면 올해 북핵 억지력을 확고히 다져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02.24 00:42

  • [서소문 포럼] 메기와 고래, 그리고 용왕

    조민근 경제산업 디렉터 “글쎄, 은행이란 게 그리 간단한 비즈니스가 아니라서….”   2017년 인터넷전문은행들이 태동하던 무렵이었다. “위기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금융지주 회장은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파괴력이 생각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이유는 이랬다. “일단 은행이란 이름이 붙는 순간, 그간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규제 장벽을 마주할 겁니다. 금융은 규제 산업이고 관치(官治)의 본류 아닙니까. 우리야 그런 환경에서 익숙하지만, IT업체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겠습니까.”   증권업에서 일가를 이룬 또 다른 최고경영자(CEO)에게 “인터넷은행에 도전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냉담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는 “겹겹의 규제와 간섭 속에서 정해진 이자나 받으며 안주하는 게 은행 아니냐”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  「 은행 ‘돈잔치’에 대통령 “과점폐해” ‘메기’ 푼다고 ‘고래’ 은행 움직일까 ‘카르텔’ 꼭대기 당국부터 변해야  」    김주현 금융위원장(왼쪽)과 이복현 금융감독 원장이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6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예측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그간 금융당국은 카카오뱅크·K뱅크에 이어 토스뱅크까지 세 곳의 인터넷전문은행을 투입했다. 하지만 공고한 과점체제에 눈에 띄는 균열은 나타나지 않았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총자산은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전체 은행 자산의 70.7%로 별 변화가 없다. 반면 가장 규모가 큰 카카오뱅크가 1.3%, 토스뱅크와 케이뱅크는 각각 0.8%, 0.4%다.   이런 과점체제가 다시 주목받게 된 건 금리 인상 국면에서 은행들이 막대한 이자 수익을 내면서다. 나날이 늘어나는 대출 이자에 민심이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자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잇달아 은행을 압박하고 나섰다. 별다른 경쟁 없이 손쉽게 이익을 내고, 그렇게 번 돈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는 비판이 봇물이 터지듯 했다. 한 발 더 나가 윤석열 대통령은 “은행 산업 과점의 폐해가 큰 만큼 실질적인 경쟁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금융당국도 바빠졌다. 당국이 검토하는 유력한 방안은 진입 장벽을 더 낮추는 것이다. 인터넷은행을 추가로 인가하거나 은행업 라이선스를 쪼개 특정 분야만 다루는 은행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6년 전과 유사한 처방이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플레이어를 다시 투입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인터넷은행도 처음에는 정체된 시장에 경쟁과 혁신의 파문을 일으킬 ‘메기’로 불리며 한껏 기대를 모았다. 미꾸라지만 그득한 수조에 포식자인 메기를 투입하면, 미꾸라지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생존율도 높아진다는 원리다. 물론 효과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소비자의 선택권은 늘었고, 모바일뱅킹은 더 편리해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시장의 판 자체는 흔들리진 않았고, 혁신적 금융상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통령 지적대로 ‘실질적 경쟁’이 일어나지 못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시중은행은 미꾸라지보다 고래에 가까웠다. 잇따른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우고 시장을 장악한 덕에 메기가 일으키는 파장 정도로는 꿈쩍하지 않았다. 한계를 느낀 메기도 수조를 휘젓는 대신 사료 부스러기에 만족하는 모양새다.   물속에는 고래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용왕’도 존재했다. 바로 금융당국이다. 은행 시스템의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시장에 전방위로 개입하는 금융 생태계의 지존격이다. 상품 개발과 판매는 물론 인사와 채용, 배당 등 수익 배분까지 은행의 일에 꼬치꼬치 간여한다. 아예 심판복을 벗고 고액 연봉의 금융사 CEO와 임원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용왕이란 표현대로 당국은 스스로 전지전능한 양, 최적의 균형 상태를 알고 있는 양 행동한다. 한 발 더 나가 ‘경쟁의 한계’까지 규정한다. 어떤 때는 예금자들을 위해 금리를 올리라고 했다가, 또 은행들이 금리를 올려 자금 확보 경쟁에 나서면 “과당경쟁을 자제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한편으론 자신의 어장을 위협하는 외부 경쟁자의 영역 침범을 견제한다. 핀테크 업체들이 간편송금 등의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자 ‘기울어진 운동장론’을 언급하며 “너희도 똑같이 규제를 받으라”고 일갈한 게 대표적이다.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며 생태계 다양성은 훼손된다. 결국 남은 건 자산 구조도, 상품도, 금리도 ‘판박이’인 일란성 쌍둥이뿐이다. 이러니 경쟁이 될 리가 만무하다. 이런 환경에 또다시 메기 몇 마리 투입한다고 대통령이 언급한 ‘이권 카르텔’이 깨질 리 없다.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카르텔의 정점에 있는 금융당국이 바뀌는 게 먼저다. 조민근 경제산업 디렉터

    2023.02.21 01:00

  • [서소문 포럼]제 발로 '공공재' 될 바보가 있을까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은 공공재’ 발언이 나온 지난달 30일 ‘2023년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겸 금융시장 안정과 금융산업 육성을 위한 토론회’. 이날 금융위원회는 글로벌 금융회사의 아시아지역본부 국내 유치를 위해 세제 혜택과 금융·노동·외환규제 완화 등 과감한 규제 혁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보고했다. 보안법 시위와 코로나 봉쇄 등으로 그간 아시아 금융허브 지위를 누려 온 홍콩에서 이탈하는 글로벌 금융사를 잡겠다는 구상이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마크 테토 TCK인베스트먼트 공동대표도 “많은 은행과 투자자가 싱가포르로 이전했다”며 “글로벌 금융사가 홍콩 대신 한국에서 사업하도록 만들면 수십조 규모의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며 윤 대통령에게 유럽과 중동 순방에서와 같은 ‘딜 메이킹’을 당부했다.    윤 대통령이 “금융산업의 선진화, 국제화 또는 금융산업의 경쟁력 강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글로벌 금융사의 한국 유치 딜이 성사될 가능성은 크지 않을 듯하다. ‘은행은 공공재’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한국 행을 주저하게 할 두려운 선언처럼 여겨질 수 있어서다.    한국의 금융 환경은 글로벌 금융사나 해외 투자자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금융당국의 각종 규제와 정책은 뒤바뀌기 일쑤다. 배당 정책 등 민간 회사의 자율적 영역까지 간섭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런 목소리, 과장된 불만이나 볼멘소리가 아니다.    은행이 낮은 예금금리와 높은 대출금리를 통한 이자장사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며 금융당국이 은행에 예금금리를 올리라고 ‘예대금리차 공시’로 등을 떠민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시중의 유동성을 빨아들이고 대출금리를 끌어올린다며 예금금리를 내리라는 주문을 이어갔다. 그 결과 기준금리보다 예금금리가 낮은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당국은 은행 등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이어가던 2021년 배당성향을 20% 이하로 유지하라고 권고했다. 코로나19 충격에 대비토록 대손준비금을 더 쌓으라는 것이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대출 만기연장과 원리금 상환 유예 조치가 이어진 데 따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배당 정책 변경에 해외 주주의 불만은 커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근 금융지주사를 상대로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하며 ‘은행주 캠페인’에 나선 행동주의 펀드 대표는 한국 정부와 금융당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불신과 불만을 전했다. 그는 “배당 확대 요구에 지지를 표하면서도 (실현 가능할지) 반신반의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한국을 제3세계 정부 보듯 말하는 그들에게 한국은 법치국가이고 선진국이라고 설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런 상황에서 금융과 은행의 공공성에 대한 강조가 공공재로 명명되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은행은 라이선스(인가) 산업으로 과점 체제의 수혜를 누리는 데다 규제 산업이고, 부실화한 은행 등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한 만큼 공공재라는 게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토론회에서 “민간기업이기 때문에 은행의 경영 활동에 정부가 과거처럼 관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공공재로 명명한 은행에 연일 날을 세우고 있다. 예대마진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둔 뒤 성과급과 퇴직금으로 나눠 갖는다며 비판한 데 이어, 지난 15일 제13차 비상경제 민생회의에서는 “물가 안정을 위한 고통 분담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주가 있는 민간 회사에 공공재라는 프레임을 씌워 금리 결정이나 배당 정책, 보수 체계까지 자율성을 침해하는 건 시장 경제의 논리에 비춰볼 때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주주에게 돌아갈 몫(배당)과 예금을 맡긴 고객에게 돌아갈 몫(이자), 임직원에게 돌아갈 몫(성과급·퇴직금)까지 정부가 간섭하는 건 과도한 개입일 수 있어서다. 관치 논란이 빚어지는 이유다.    뛰는 금리에 어려움을 겪는 국민을 위해 돈을 내놓으라며 은행을 때리는 건 은행의 공공성과 공적 책임을 감안해도, 재정의 영역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까지 은행에 넘기려는 것으로도 비친다. 정부와 당국의 서슬 퍼런 기세에 은행권은 바로 몸을 낮췄다. 수치 부풀리기란 지적에도 이날 은행연합회는 향후 3년간 10조원을 공급한다는 내용의 ‘은행 사회 공헌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은행=공공재’가 된 마당에,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로 글로벌 금융사를 유인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제 발로 '공공재'가 되는 길을 선택할 바보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2023.02.17 01:03

  • [서소문 포럼] 사랑의 이해(理解), 사랑의 이해(利害)

    정현목 문화부장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지난주 막을 내렸다. 네 청춘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지만, 삶의 무게와 현실의 벽 앞에서 엇갈리고 상처 받고, 그러면서 사랑을 이해(理解)해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다.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은 큰 요인이 계급 차로 인한 이해(利害)관계라는 점에서 드라마 제목은 중의적이다. 계급 관계가 선명한 은행 창구에서 주인공들은 각자의 처지로 갑을 관계에 갇히며 힘든 사랑을 시작한다.   고졸 텔러 안수영(문가영)은 자신을 좋아하지만, 진지한 교제 앞에서 망설이는 강남 8학군 명문대 출신 은행원 하상수(유연석)를 마음 속에서 밀어내고, ‘어울리는’ 상대인 청원경찰 정종현(정가람)과 연애를 시작한다. 같은 지점의 금수저 대학 후배 박미경(금새록)은 상수에게 구애를 하고 사내 커플이 된다.     ■  「 현실적 연애 그린 드라마의 여운 영화 ‘기생충’의 멜로버전 평가도 양극화 사회서 사랑은 무엇일까 」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의 하상수(유연석·오른쪽)와 안수영(문가영). [사진 SLL] 하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상수는 명품 재킷·외제차 등 미경의 선물 공세에 상대적 결핍을 느끼고, 더는 가까워지지 못한다. 서열은 수영-종현 커플에게도 갈등 요인이 된다. 수영이 아낌없이 퍼주는 사랑을 할수록 가난한 종현의 마음엔 빚만 쌓여간다.   이처럼 관계가 엇갈린 건, 애초에 상수가 사랑 앞에서 망설이고, 수영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깟 사랑인데, 사랑만 하면 되는 건데, 세상은 이들의 마음이 서로 와 닿는 걸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보는 이는 마음만 갑갑해질 뿐이다.   “조선시대의 계급은 신분이 정했고, 2022년 대한민국의 계급은 돈이 정한다. 은행을 찾는 사람들에게도, 은행에서 일하는 우리들에게도 계급이 있다. 그리고 나와 그녀의 사이에도”라는 상수의 내레이션을 비롯해, 주인공들에게 내면화한 계급의식을 드러내는 대사도 많다.   “누구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게 우리에게는 절실한 게 화가 나요.”(수영), “선배, 우린 비슷하잖아.”(미경), “우리는 다르잖아요. 우리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것 싫어서 그래요.”(종현)   드라마는 사랑이란 감정만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건 쉽지 않다, 사랑에도 계급이 있다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민낯을 그려낸다. ‘과연 사랑만으로 사랑이 될까?’라는 동명 소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았다.   그래서일까. 정덕현 평론가는 이 드라마를 영화 ‘기생충’의 멜로 버전이라 평했다. ‘계급의 이해’ ‘사랑의 계급’이란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시청자 댓글도 많다. 드라마는 열린 결말로 끝났지만, 사랑에 끼어드는 돈과 신분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여운이 길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라는 명대사의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부터, 최근 재개봉한 영화 ‘타이타닉’ 등 계급이 사랑을 가로막는 서사는 차고 넘친다. 계급을 뛰어넘어 기어이 이뤄내고야 마는 사랑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니, 점점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사랑 앞에서 조건을 따지면 속물이라 손가락질받는 건 옛날이야기다.   사랑도 돈으로 재단되는 이 시대, 은행만 고객을 재산으로 분류하는 게 아니다. 결혼정보회사는 더 촘촘하게 회원들을 계급화한다. 직장과 학력, 나이, 외모, 연봉에 더해 부모 직업과 재산까지 꼼꼼히 따진다. 결혼은 어찌 보면 사랑의 결실이 아닌, 조건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런 매칭 시스템은 계급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가팔라지는 양극화 속에서 ‘적어도 지금 지위는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예비 배우자의 직업·소득·학력·집안 등을 따지는 ‘동질혼’이 이 시대의 트렌드가 됐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임대 아파트, 빌라 사는 애들과는 친구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란 청년들의 머릿속엔 이미 차별과 등급이 내면화돼 있다. 끼리끼리 사귀고 결혼하려 한다.   드라마 속 안수영의 소개팅 장면은 그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안수영이 대기업 남자와의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이 고졸이란 걸 밝히자, 남자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드라마에 나오진 않지만, 남자는 주선자에게 “왜 급이 안 맞는 여자를 소개해 줬냐”며 불쑥 화를 냈을 법하다.   “사람들은 물건 하나 사도 재고 따지고 후기까지 따져보면서, 사랑이란 감정에만 무진장 결벽을 떤다. 속으론 온갖 계산 다 하면서 아닌 척”이라는 상수 친구 소경필(문태유)의 대사가 가슴에 아프게 박힌다. 사랑만으로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상수와 수영이 사랑의 이해(利害)를 뛰어넘어 사랑의 열매를 맺길 바란다. 드라마에서만이라도…. 정현목 문화부장

    2023.02.14 00:51

  • [서소문 포럼] 쇼트트랙, 양궁에서 배워라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한국 쇼트트랙은 세계 최강이다. 호리병 주법은 물론 날 들이밀기 등 다양한 전술을 개발해 국제 대회에서 숱한 메달을 따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 쇼트트랙은 최고의 복마전으로 불린다. 갈등과 잡음이 끊이지 않아서다. 지도자가 선수를 때리는 건 다반사, 선배와 후배의 갈등은 물론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성폭력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파벌이 갈려서 싸우기를 벌써 20년, 해묵은 갈등과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최근 빙상팀 지도자 공모를 진행했던 성남시청은 고심 끝에 “코치직 합격자가 없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한국이름 안현수)과 지난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당시 중국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선태 감독,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로 활동한 여준형 전 국가대표팀 코치 등이 지원했지만, 결국 모두 탈락했다. 이 과정에서 성남시청 소속 선수들은 “공정하고 투명하게 코치를 선발해달라”는 입장문까지 발표했다.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세우던 성남시청은 결국 7명의 지원자 중 합격자를 내지 못하고 코치 선발을 다음으로 미뤘다.     ■  「 20년째 잡음 끊이지 않는 빙상계 성남시청 코치도 제대로 못 뽑아 파벌주의·줄세우기 구습 버려야 」    2022년 베이징 겨울올림픽 당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을 지도했던 김선태 감독(왼쪽)과 빅토르 안. [연합뉴스] 성남시청의 코치 선발 과정은 한국 쇼트트랙의 부끄러운 민낯을 다시 한번 보여준 해프닝이었다. 일부 빙상계 인사들은 지원자 명단이 알려지자 “빅토르 안은 러시아 귀화 전 올림픽 금메달 연금을 일시불로 받아갔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또 “김선태 감독도 국내에서 선수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들의 의견은 다르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포함된 성남시청 선수들은 “선수들이 원하는 것은 훈련과 경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라며 “시합을 뛰는 건 결국 선수들이다. 훌륭한 팀을 이끌기 위해선 경력이 가장 우수하고, 역량이 뛰어나며 소통이 가능한 코치님이 오셔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원하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이나 김선태 전 중국대표팀 감독은 경력과 역량 면에서 뛰어난 지도자다. 빅토르 안은 올림픽 쇼트트랙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유일한 선수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선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땄다(물론 이때는 빅토르 안이 아닌 안현수였다). 2011년 러시아로 귀화한 이후엔 이름을 빅토르 안으로 바꾸고 2014년 소치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도 그는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땄다.   그러자 그해 2월, 박근혜 대통령이 말했다. “안 선수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안 선수의 문제가 파벌주의, 줄 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와 구조적 난맥상에 의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대통령의 서슬 퍼런 발언 이후 청와대 수석과 정부가 팔 걷고 나서서 쇼트트랙계의 난맥상을 파헤쳤다. 하루가 멀다고 부조리 근절 방안이 나왔고 많은 이가 옷을 벗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쇼트트랙계의 잡음과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 정치권에 줄을 대는가 하면 중상모략으로 상대편을 깎아내린다. 최근엔 ‘제2의 빅토르 안’이 등장했다. 훈련 도중 남자 후배의 바지를 잡아내리는 장난을 쳤다가 빙상연맹으로부터 1년 자격정지를 당했던 임효준이다. 그는 2021년 중국으로 귀화한 뒤 린샤오쥔이란 이름으로 최근 월드컵 5차 대회에 출전, 2개의 금메달을 땄다.   한국 쇼트트랙은 도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체육계 관계자에게 물어봤더니 “한마디로 먹을 게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남자선수의 경우)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지도자가 돼도 안정된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정답은 아닌 듯하다. 국제 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따내는 양궁의 경우 잡음이 일절 없다. 양궁 대표선수가 되는 건 쇼트트랙 대표가 되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도 양궁협회는 공정한 선발 방식과 철저한 관리로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물론 쇼트트랙과 양궁은 다르다. 양궁은 기록경기지만, 쇼트트랙은 몸싸움이 치열한 종목이다. 그렇다 해도 20년 넘도록 진흙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은 더는 참기 어렵다. 또다시 정부와 사정 당국이 나서서 칼을 휘두르는 불행한 사태를 맞기 전에 빙상인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 올림픽 메달만이 능사는 아니다.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2023.02.10 01:02

  • [서소문 포럼] 푸틴의 머릿속 세상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길래 21세기에 이토록 무모한 침략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1년 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시작한 우크라이나 침공 얘기다. 뉴욕타임스(NYT)의 우크라이나 전쟁 기획 보도(Putin’s War)에서 푸틴의 머릿속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한 대목을 찾았다.   “푸틴은 16개월 동안 서구 지도자들과 단 한 차례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대신 어딘지 모르는 미스터리한 장소에서 화상 회담만 했다.” 또 다른 구절이다. “푸틴을 만나는 이들은 먼저 사흘을 격리한 후에야 거의 15피트 거리를 두고 대면할 수 있었다.” 푸틴이 대면 접촉에 예민했던 건 코로나19 때문으로 보인다.     ■  「 “서구의 포위는 러시아에 위협”   선과 악, 아군과 적 이분법 신념 우크라 침공 따른 이득 불투명 중국이 되레 과실 챙길 가능성 」    지난해 11월 2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법관 회의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 [AP=연합뉴스] 자발적이든 강요됐든 고립은 대가를 요구한다. 고립은 왜곡된 믿음의 나선 효과를 강화한다. 외부와의 소통을 피할수록 우리만의 세상이 전부가 되고 나의 믿음만이 더욱 진리가 되며 편견과 고집이 나선처럼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반대로 바깥에선 문고리 권력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며 공식 시스템을 뛰어넘는다.   고립을 선택했던 푸틴이 머릿속에 만든 세상, 즉 이를 ‘푸틴 유니버스’로 칭한다면 그 첫 기둥은 ‘외부의 위협’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년가량 앞둔 2021년 7월 발표한 글(‘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연대에 관하여’)에서 우크라이나에서 “반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이 뿌리와 조상을 부정하고 러시아를 적으로 여기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분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서구의 포위로 간주했다.   그의 둘째 기둥은 ‘순결한 우리’다. 푸틴은 같은 글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를 “영적 결속(spiritual unity)”으로 묘사했다. “우리의 영적 결합이 공격받고 있다”고 규정했다. 반면 그에게 서구는 도덕적으로 혼탁해졌다. “성평등 정치로 인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모1’과 ‘부모2’로 대체됐다”는 게 푸틴이 자주 거론했던 서구 비판이었다.(NYT)   푸틴 유니버스의 셋째 기둥은 의로운 전쟁이다. 바깥의 악한 세력에 맞서 영적인 연대를 지키는 성전(聖戰)이다. 푸틴은 과거 소련이 악의 세력 ‘나치 독일’과 전쟁을 했다면 이젠 우크라이나를 삼키려는 네오 나치와 싸워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그는 위의 글에서 “급진주의자들과 네오 나치들이 점점 더 무례하게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관료 조직과 지역 토호가 이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21년 10월 당시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가 푸틴을 만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푸틴과의 회담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러자 푸틴은 “이 사람과는 할 말이 없다”며 “젤렌스키는 도대체 어떤 유대인인가. 이 사람은 나치의 조력자”(NYT)라고 비난했다. 유대인인 젤렌스키가 유대인의 적인 나치에게 부역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분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젤렌스키가 ‘유대인 나치 부역자’인가.   이리 보면 푸틴의 세계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나 SF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선한 우리와 악당들이라는 이분법 속 악당 척결을 위한 대결의 구도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계이고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상이 달라진다. “동유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던 서구의 약속이 과거 소련 위성국들의 나토 가입으로 깨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서유럽의 동진은 근본적으로 ‘러시아 클럽’보다 ‘서구 클럽’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건 스타워즈 리더십이다. 세상을 불의한 제국군과 고통받는 저항군으로 가른 뒤 무법적이고 타락한 자들을 물리쳐 정의를 구현하자는 리더십은 현실을 가리는 맹목적 지지를 양산하곤 한다. 선과 악, 순결과 타락은 절대자인 신과 불완전한 나와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신앙의 영역에 남겨 놔야 한다.   푸틴과 추종자들에게 우크라이나 침공은 장엄한 전쟁일지 모르나 세계는 이로 인해 고통받고 시험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가 얻을 게 있는지도 불투명하다. 러시아가 지상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수도까지 진격했음에도 반러 정권이 건재한 상태로 전쟁이 끝날 경우 러시아의 실패다.   게다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뒷배인 미국과 전쟁을 치르며 국력을 쏟아부었는데, 그 싸움의 이득은 중국이 취할 가능성이 등장하고 있다. 재주는 러시아가 넘고 이득은 중국이 챙기는 경우의 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대만 침공 명분을 만든 중국이 유럽에서 힘을 투사해 기운이 빠진 미국을 상대로 양안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는 시나리오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2023.02.07 00:55

  • 세월호는 항소 포기한 한동훈…'항명 임은정'엔 항소, 왜 [서소문 포럼]

    최현철 사회디렉터 지난달 13일 춘천지검 강릉지원에서 조업 중 납북됐다 귀환 후 간첩으로 몰린 무진호 선장 고 손용구씨와 삼창호 선원 고 김달수씨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 이동희 판사의 최종 판단은 ‘무죄.’ 그는 “지난 공판 때 검찰이 구형한대로”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다른 과거사 사건과 달리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거치지 않고 피고인 유족이 직접 낸 재심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도 검찰은 지난해 12월 13일 무죄를 구형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느껴졌다.   기억은 딱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2012년 12월 28일 서울지법(현 서울중앙지법)에선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 동조한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윤길중 전 진보당 간사의 재심사건이었다. 주인공은 임은정 검사(현 대구지검 중요경제범죄수사부장). 그는 결심공판이 열리는 법정에 들어오면서 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갔다. 이어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했고 곧바로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발칵 뒤집어졌다.     ■  「 재심 무죄구형 징계했던 검찰 최근 세월호 항소포기 등 변화 ‘임은정 사건’ 불복…아직 지켜봐야 」    지난달 12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관계자들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세월호 참사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 판결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사실 임 검사는 이미 석 달 전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 박형규 목사의 재심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이전까지 검찰은 시국사건 재심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재판부가 판단해달라”며 백지 구형을 해왔다. 그런데 임 검사가 관행을 깨고 반성까지 담아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여론은 환호했지만, 검찰 조직의 분위기는 달랐다. 석 달 뒤 윤길중씨 결심 공판을 앞두고 공안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임 검사가 이의제기권을 행사하며 버티자 아예 담당 검사를 교체했다. 임 검사는 결국 ‘문 잠그고 무죄 구형’이라는 대형 사고를 쳤다.   도가니 검사로 유명해진 그의 검사 인생은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았고, 2015년에는 적격심사에서 탈락 위기에 몰렸다. 5년에 걸친 소송 끝에 징계 취소 판결을 받았지만, 그동안 승진에서 누락되고 한직을 떠돌았다. ‘항명검사’ ‘배신자’ 같은 주홍글씨도 따라다녔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재심사건에 소극적인 검찰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백지 구형을 고집하고, 무죄가 나도 항소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2019년 7월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제5공진호 사건이 대표적이다. 불과 한 달 전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이 “재심 무죄 선고 시 유죄 인정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면 상소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구체적 지침을 밝혔지만, 검찰은 보란 듯 항소했다.   이런 검찰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취임하면서다. 서막은 1975년 20년 형을 확정받고 8년을 복역한 이창복씨 사건이었다. 그는 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뒤 이듬해 손해배상을 청구해 위자료 6억원, 지연손해금 4억9000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2011년 대법원이 “지연손해금을 1975년부터 계산한 것은 잘못”이라며 판례를 변경하면서 악몽 같은 ‘빚 고문’이 시작됐다. 국정원이 제기한 반환소송에서 진 뒤로 연체이자까지 더해져 토해낼 돈이 15억원으로 불었다. 그동안 법원이 연체이자를 면제해주자는 중재안을 냈지만, 국정원은 요지부동. 그런데 한 장관이 취임 한 달 만에 이를 전격 수용한 것이다.   8월에는 제주 4·3 사건 피해자에 대한 직권재심 대상을 일반재판을 받은 사람들까지로 확대했다. 그동안 개정된 특별법에 따라 군사재판에서 형을 받은 사람만 대상이었는데, 이 조치로  1500여명이 혜택을 입게 됐다. 10월엔 부산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무죄 피해자들에게 72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자 즉각 항소를 포기하고 수용했다.   그리고 이번 주, 세월호 피해자 유족에게 국가가 868억원을 배상하라는 항소심 판결에 대한 상고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1심보다 배상액이 145억원이나 늘었지만 쿨하게 수용했다. 한 장관은 “국가 잘못이 명확히 확인된 이상 신속히 재판을 종료해 피해를 회복시키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한 장관의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 평가는 엇갈린다. 검찰이 과거를 반성하고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적어도 힘과 명분을 가졌는데도 뒷짐 지고 있었던 전 정부에 비해선 진일보했다. 반면 야권 인사들을 향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물타기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검찰이 강릉에서 납북어부들에게 무죄 구형을 하고 1주일 뒤, 서울에서 눈길이 가는 판결이 나왔다. 임은정 검사가 검사 블랙리스트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며 낸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10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난달 10일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아직은 모든 게 혼란스럽다. 최현철 사회디렉터

    2023.02.03 01:00

  • [서소문 포럼] 땅따먹기와 정치

    임종주 정치에디터 지난 설 연휴 무심코 유튜브를 뒤적이다 낯익은 듯한 모습에 눈길이 갔다. 두 형제가 방에 큼지막한 도화지를 펴 놓고 각자 귀퉁이에 작은 반원을 그려 자기 구역을 표시한다. 이어 손끝으로 병뚜껑(말)을 쳐서 영역 밖으로 내보냈다가 세 번 만에 출발지로 되튕긴다. 그렇게 귀환에 성공해 말이 지나간 길을 펜으로 죽 긋기만 하면 그 안쪽은 자기 땅 차지가 된다. 놀이터만 흙바닥에서 종이로 바뀌었을 뿐 영락없는 ‘땅따먹기’ 놀이다. 추위에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놀던 게 족히 수십 년은 됐는데 이렇게 명맥을 잇고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 연원을 알 길은 없지만, 땅이 전부이던 농경민족의 토지 소유욕이 놀이로 구현돼 대대로 전래했다는 게 통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유입된 왜색 문화라며 경원시하는 부류도 있다. 욕심에 눈이 멀어 말을 너무 세게 튕겼다가는 헛심만 쓴 꼴이 될 수 있어 과욕은 금물이라는 가르침도 은연중 내포한다. 놀이에서 풍기는 탐욕적 냄새 탓일까. 땅따먹기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지나친 소유욕이 빚어내는 허상을 꼬집는 소재로도 곧잘 쓰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침탈에서부터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 행태, 졸부의 망국적 부동산 투기에 이르기까지. 시인 강희복은 동명의 시(2014)에서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지구에/ 선을 그어 놓고/ 침을 바르며/ 내 땅이니 네 땅이니/ 그리고 몇 평이니 하면서/ 땅따먹기 하고 있다/ 아,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짓인가’라며 앞뒤 안 가리고 땅따먹기에 돌진하는 세태를 일갈했다. 2020년 4월 15일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관계자들이 투표지를 분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도 속성을 따지고 보면 땅따먹기와 도긴개긴 아닌가. 저마다 깃발이 오르기만을 기다렸다가 앞다퉈 말을 타고 달려나가 험지든 길지든 표밭을 갈고 다져 자기만의 텃밭을 일구려 용을 쓰니 말이다. 다만, 그 과정은 정정당당해야 하고 반칙이 용인돼선 안 된다. 상대를 악마화해 극한 대결적 구도로 몰아가서도 안 된다. 경쟁이 끝나고 난 후의 승복과 협치, 관용의 싹을 자르는 치명적 과오가 되기에 그렇다.   ■  「 오늘이 선거구 획정 인구 산정일 '소선거구제 개편' 회의론 여전 낡은 정치와 헤어질 결단 필요해 」  게임의 룰을 정하는 첫 단추 역시 땅을 나누는 일, 선거구 획정이다. 기본 잣대는 인구다. 선거일 전 15개월이 속하는 달의 마지막 날 주민등록표 조사로 산정한다. 내년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1월 31일(오늘)이 바로 그 기준일이다. 이날 인구 등을 토대로 오는 4월 10일 전까지 줄 긋기 작업을 끝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 이전투구로 기한을 넘긴 게 다반사였다. 법 조항은 사문화한 지 오래다. 그만큼 땅 가르기는 이해 당사자의 사활이 걸린 복잡한 문제다. 올해는 벽두부터 초대형 변수가 스며들었다.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 한 명을 뽑는 현행 소선거구제 자체를 개혁하자는 논의가 급부상했다.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명절 밥상머리에서 가족, 친지와 정치 얘기는 삼가라는 게 불문율이라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김진표 국회의장까지 가세한 선거구제 개편안은 설 밥상을 제법 오르내렸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닻을 올린 소선거구제는 당시 독재 종식의 대의를 위해 소구된 측면이 있다. 그 후 35년. 시대 변화를 거듭하면서 이젠 한계 상황에 직면한 듯하다. ‘올 오아 낫씽’(all-or-nothing)식 승자 독식주의는 많은 유권자의 표를 사표로 만들었다. 지역주의 구도는 심화하고, 거대 양당 독과점 체제는 콘크리트처럼 굳어졌다. 극심한 양극화와 대결의 정치로 타협과 절충을 통한 민주적 합의 도출은 무력화했다. 정치 불신은 임계점에 다다랐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관계법개선소위원회가 지난 19일 국회에서 개최한 전문가 공청회. 뉴스1 여야 의원들이 초당적 개혁 모임을 발족하고, 보수·진보 시민사회단체가 이례적으로 한자리에 모여 정치 개혁을 촉구하는 등 변화의 추동력은 움트고 있다. 그런데도 저변에는 여전히 회의론이 팽배한 게 현실이다. 한 의원은 사석에서 “소선거구제 개편은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혀 있어 어차피 안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지난 19일 전문가 공청회에선 국회의원 숫자부터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불쑥 나왔다고 한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서로의 이해관계를 ‘무지의 베일’ 아래 묻어두는 결단 없이는 개혁의 물꼬가 트일 리 만무하다. 우리네 민초들은 잊은 듯하면서도 분수 모르는 ‘땅따먹기’엔 어김없이 통렬한 질책을 가했다. ‘네 이놈들!/ 그게 어디 네 땅이냐 내 땅이지! (중략) 종일 빼앗은 땅/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재덕 시집 『땅따먹기』 2021) 어쩌다 마주친 두 형제의 땅따먹기 놀이는 비록 하찮아 뵈도 ‘이 땅은 본디 누구의 땅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상기시킨다. 임종주 정치에디터

    2023.01.31 01:07

  • [서소문 포럼] 급식카드, 걸식카드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불구기형의 ○○을 공중에 관람시키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1960년대 한국의 어떤 법 조항이다. 빈칸을 채우는 순간 당신의 표정은 일그러질 것이다. 이 조항은 1961년 12월 제정된 아동복리법 15조 1항이다. ○○은 ‘아동’이다. 60여년 전의 한국은, 특히 아이들에게, 야만의 제국이었다. 지금은 ‘불구기형의 아동’이라는 표현조차 용납되지 않건만, 그때는 ‘관람’까지 시켰다. 부랑아, 앵벌이, 구걸 등의 표현이 일상으로 쓰이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녀자의 옷자락을 잡고 구걸하는 꼬마거지, 기지촌 여성과 미군의 성매매를 연결해주는 슈샤인보이가 사회 문제로 거론됐다.   아동복리법 15조가 정한 금지행위를 보면 시대상은 더 적나라해진다. 앞 순위에 아동을 이용한 걸식(2항), 14세 미만에게 곡예를 시키거나(3항) 접객영업을 시키는 행위(4항), 음행을 시키거나 매개시키는 행위(5, 6항) 등이 명시돼 있다. 전쟁 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선 아동을 이용한 어른의 횡포와 착취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  「 아동복지법은 우리 시대 자화상 구걸·학대·접객 등 금지행위 변천 아이들이 선뜻 못 쓰는 급식카드 또 다른 낙인찍기가 되지 말아야 」    김성진씨는 결식아동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눈치 보면 혼난다”고 적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아동복리법도 5·16 쿠데타(1961년)의 산물이었다. 느닷없이 아동 보호에 눈을 뜬 게 아니라 ‘사회정화사업’의 일환이었다. 외국에 보여주기 부끄러운 사회 문제를 일단 감추고 보자는 독재자의 체면치레 측면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동복지법으로 이름이 바뀌고 금지행위에도 변화가 있었다. 2000년 개정법은 신체적, 성적, 정서적 학대 금지가 1, 2, 3항으로 올라왔다. 2012년 개정법에서는 아동매매(1항), 음행을 시키거나 음행 매개(2항), 신체 학대(3항) 순으로 바뀌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아동의 정의는 ‘만 18세 미만의 사람’으로 유지됐지만, 그들이 맞닥뜨리는 공포와 위험은 달라졌다. 앞서 언급한 1961년의 금지행위 1항은 어찌 됐을까. 현행 아동복지법 17조 7항 ‘장애를 가진 아동을 공중에 관람시키는 행위’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복지국가로 자리매김한 지금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조항이다. 한국은 유엔 가입(1991년) 이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면서 30여년 간 아동복지를 폭발적으로 확대해 왔다.   점점 더 두꺼워진 아동복지법은, 그러나, 허점투성이였다. 법과 제도는 늘 사후적이고 섬세하지 못했다. 학대와 성폭행, 인신매매 금지가 금지행위 앞 순위를 차지한 것도 관련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사후약방문, 땜질 입법이 반복됐다. 아이들의 아우성을 먼저 들은 적은 없었다. 아동복지법의 역사를 되돌아본 것도 최근 기사를 통해 결식아동의 실상을 접했기 때문이다.   아동복지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아동의 건강 증진과 체력 향상을 위한 지원’을 의무(35조)로 규정했지만, 가난한 아이들의 마음까지 읽지는 못했다. 가난을 감추고 싶은 사춘기의 심리를 놓쳤다. 한 달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20여만원짜리 선불카드를 줘도 음료수를 사 먹으려면 “이거 사도 되나요”라고 물어야 했다. 급식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가맹점 찾는 건 ‘모험’이고, 자신을 향한 싸늘한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기계적으로 계산만 하는 편의점 알바가 ‘급식 천사’로 느껴진 이유다. 방학이면 급식카드의 편의점 사용률은 80%를 웃돌았다.   물가 상승은 한 끼(8000~9000원), 하루(2만~2만7000원) 사용 한도를 지켜야 하는 아이들을 주눅 들게 했다. 부모의 오·남용이 걱정돼 한도를 정했지만, ‘낙인’은 더 선명해졌다. 결식(缺食)을 걸식(乞食)처럼 느끼게 한 ‘디테일의 악마’. 결식아동 이름을 부르며 공짜 식권을 나눠주던 20년 전 무개념 선생님의 그림자가 지금도 어른거렸다. 결식을 걸식으로 발음해 웃음거리가 됐던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실수와는 차원이 다른, 시스템의 오류다.   일각에선 한 끼 8000원이 적은 돈이냐고 따진다. 누가 그걸 모르나. 게다가 우리가 낸 세금 아닌가. 그 귀한 돈을 매년 수천억원씩 쓰면서 정작 아이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현실은 누가 책임져야 하나. 급식카드에 새긴 꿈(서울)과 드림(경기도)은 누구를 위한 각인인가.   참다못한 일부 자영업자는 결식아동이 카드를 꺼내지도 못하게 공짜로 음식을 제공하며 “눈치 보면 혼난다”는 문구를 붙였다. 초밥집 사장 김성진(33)씨는 “가난한 아이들이 남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국회의원과 공무원은 왜 이런 장삼이사의 생각을 따라잡지 못했을까. 진정 아동을 관람·구걸시키던 60년 전의 나쁜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인가.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2023.01.27 00:46

  • [서소문 포럼] 외교안보 발언의 나비효과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 장병들을 만난 자리에서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즉각 파문을 일으켰다. 나세르 칸아니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페르시아만 국가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긍정적 관계 개선에 대해 전적으로 모르는 발언”이라며 “이란 외교부가 한국 정부의 최근 스탠스, 특히 이란과 UAE의 관계에 대한 외교적으로 부적절한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평가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한국 외교부는 “이란과의 지속적 관계 발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의지는 변함없이 확고하다”고 해명해야 했다.   윤 대통령이 이란을 UAE의 적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사실과 다르다. 이란은 중동 지역 패권을 추구하고 UAE와 페르시아만 3개 도서 영유권 분쟁을 벌이며 관계가 껄끄럽지만 두바이 체류 이란인이 60만 명으로 추산되는 등 교류가 활발하다. 외교부 ‘2023 UAE 개황’에 따르면 UAE는 “이란을 최대의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하면서도 실리적인 경제 관계를 구축하며 양국 관계를 관리해 나가는 중”이다. 서방의 제재 속에 이란은 수입의 68%를 UAE에 의존하고, UAE의 이란 수출액은 지난해 120억 달러(약 15조원)를 넘어설 것으로 보이는 등 경제적으로 밀접하다.     ■  「 “UAE의 적은 이란” 외교 파장 상대국 배려 없고 사실도 아냐 지도자의 말은 절제·정제돼야 」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에 파병한 아크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는 윤석열 대통령. [뉴시스] 윤 대통령의 발언은 UAE 순방 성과를 스스로 깎아내렸다. UAE는 이번에 원자력·에너지·투자·방위산업 등의 분야에서 한국에 300억 달러(약 37조원)의 투자 방침을 밝혔다. UAE의 통 큰 투자는 세계적 경기 부진으로 위축된 한국 경제에 활력소가 될 전망이다. 엄청난 순방 성과가 한순간의 말실수에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발언에 한국과 이란 관계는 더욱 냉랭해졌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 인한 미국·유럽연합(EU) 등의 경제 제재에 한국도 동참하면서 한국과 이란의 직접 교역은 미미하다. 그러나 이란은 한국의 중동산 석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장악하고 있다. 이란과의 관계 악화는 석유 수입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또 서방의 제재가 풀리면 이란과의 경제 교류를 재개해야 하는데 이란 내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깊어지면 악영향을 받게 된다.   윤 대통령의 외교 실언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뉴욕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짧은 회담 이후 회의장을 나서면서 비속어가 섞인 말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윤 대통령은 지난 11일 외교·국방부 업무보고에선 “더 (북핵) 문제가 심각해지면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가 심각해지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전술핵 배치와 핵무장을 공개적으로 거론해 파문이 일었다.   전술핵 배치나 독자 핵무장은 한·미가 공유하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미국 행정부의 핵 비확산 기조와 배치돼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 강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한·미 정부의 입장이다. 원론적 발언이라고 해도 한국이 독자 핵무기 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오해를 불러와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말은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절제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중국발 입국자에 대한 검역 강화도 과한 측면이 있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중국발 입국자에 대해 입국 전후 유전자증폭(PCR) 검사뿐 아니라 단기 비자 발급 제한 등의 조치를 내놨다. 중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 10일 한국·일본에 대해 단기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 중국은 주요국 중 유일하게 단기 비자 발급을 제한한 한국과, 가장 먼저 중국에 대한 검역 강화 조치를 발표한 일본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한·중은 서로를 향해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다고 주장한다. 방역을 둘러싼 한·중의 공방에 중국 진출 기업인·교민이 피해를 보고 있다. 씀씀이가 큰 중국인 관광객 입국이 막히며 관광·면세산업의 타격이 예상된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경제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검찰에서 경력을 쌓아 외교안보 경험이 적다. 참모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 특히 외교안보는 상대국이 있는 만큼 발언의 파장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외교안보에선 침묵이 말보다 나을 때가 많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콘텐트제작에디터

    2023.01.20 00:48

  • [서소문 포럼] ‘전기세’와 헤어질 결심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이럴 거면 한전을 왜 상장시켰나.” “차라리 주식을 거둬들여 국유화하라.”   지난해 말 전기요금 인상 발표 직후 한국전력 소액주주들이 모인 토론방이 들끓었다. 정부가 밝힌 인상 폭은 킬로와트시(㎾h)당 13.1원. 인상률은 9.5%로 1981년 2차 석유파동 이후 최대였다. 하지만 주주들의 기대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는 전기요금이 원가 수준을 회복하려면 ㎾h당 51.6원 올려야 한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시장에선 이번에는 못해도 30원은 올리지 않겠냐는 예상이 흘러나왔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인상 폭에 대해 “상당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결국은 요청액의 4분의 1만 반영했다. 한전으로선 올해도 팔수록 밑지는 장사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새해 증시가 열리자마자 한전의 주가는 11% 넘게 폭락했다.     ■  「 빚덩이 한전, 채권 이어 증시 압박 또다른 ‘코리아 디스카운트’ 우려   ‘단계 인상’ 말보다 제도 보완부터 」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업무 보고를 받기 전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소액주주의 분노에 “누가 그런 주식 들고 있으라 했나”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한전의 천문학적 빚덩이가 일으킨 흙탕물이 한전 소액주주들에게만 튀는 게 아니란 것이다. 증권가에선 벌써 “한전이 국내 증시 반등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라면 한전은 올해도 10조원 가까운 적자를 낼 전망이다. 올해 코스피 상장기업들의 예상 수익이 통틀어 150조원가량인데, 한전이 10조원을 까먹으면 한국 증시 전체의 주가수익비율(PER)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코스피가 실적에 비해 비싸게 보이도록 만드는 효과를 낸다. 또 하나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한전의 빚덩이에 짓눌린 건 증시뿐만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채권시장을 휘저어 놓는 바람에 기업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적자에 빠진 한전은 지난해 이후 대규모 채권을 발행하며 ‘블랙홀’처럼 돈을 빨아들이고 있다. 부채비율도 지난해 425%까지 올라간 것으로 추산된다. 민간기업이라면 부채비율이 200%만 넘어가도 돈 빌려달라고 손 내밀기가 힘들다. 그런 한전이 국가가 보증하는 공기업이란 이름으로 높은 금리까지 내세워 시중 자금을 쓸어갔다. 그러니 대부분의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금리를 더 주고 급한 자금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시중금리 오름세도 가팔라졌다. 대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자를 더 치러야 했다. ‘싼 전기료’가 미래세대에 부담을 지우는 차원을 넘어 당장 시장을 왜곡하고, 무작위로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요금의 결정권은 정부에 있다. 전기요금이 흔히 ‘전기세(稅)’로 불리는 이유다. 한전이 조정안을 짜 주무부처인 산업부에 올리면 기재부와 협의해 인가할지를 결정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실상은 정부가 인상 여부뿐 아니라 인상 폭도 결정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급과 원가라는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가 작동한다. 기재부는 물가 부담을 이유로, 여당은 정치적 부담을 들어 인상을 꺼린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는 이런 현상이 극심해진다. 2021년부터 전기 원료 가격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요금 인상을 틀어막았다. 그 결과 2021년 이후 지난해 6월까지 한국의 전기요금 인상은 4.6% 오르는 데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일본은 35.6%, 프랑스는 25.6%, 미국은 21.5%를 각각 인상했다. 가격이 왜곡되니 수요 조절 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요금을 대폭 올린 유럽연합(EU) 24개국에선 지난해 1~10월 전력소비가 10.8% 줄었다. 반면 원가보다 싼 전기요금을 유지한 한국에선 오히려 소비가 4% 늘었다. 그 차액 만큼 고스란히 쌓인 빚이 지난해 30조원을 넘긴 것으로 추산된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쌓인 숙제 하듯 요금인상에 나섰지만 역시 속도는 더디다. 기재부의 입장은 전기요금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경기는 꺼지고, 내년 4월 총선도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간의 경험칙상 ‘단계적 현실화’란 에너지 가격이 안정되길 바라며 시간을 벌려는 궁여지책일 가능성이 크다.   시장도 이를 의심하고 있다. 맥을 못 추는 한전 주가가 그 방증이다. 불신을 넘어서려면 말보단 행동이 필요하다. 유명무실한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부터 제대로 작동하도록 보완하라는 얘기다. 그러자면 전기요금이 아닌 전기세와 헤어질 결심부터 단단히 해야 한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말이다.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2023.01.17 00:53

  • [서소문 포럼] ‘출산 대출 탕감’이 불안한 이유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인한 폭우에 포항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침수된 사고로 주민 7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은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기엔 역부족이지만 시민안전보험에 가입한 포항시는 유족에게 최대 2000만원의 보험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엄마와 헤어져 주차장을 탈출하다 안타깝게 숨진 14살 소년이다.    이런 예외가 생긴 건 미성년자의 사망보험 가입을 금지한 상법 732조 때문이다. ‘15세 미만자 등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한 계약은 무효로 한다’는 규정이다. 해당 조항은 보험금을 노리고 미성년자에 위해를 가하거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범죄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남성이 보험금 1000만원을 받으려 자녀의 손가락을 자른 범죄가 발생한 게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보험금을 노리고 어린 자녀에게 해를 가하는 범죄가 이어지자 2009년 금융감독원은 미성년 사망보험을 금지했다. 자식의 목숨값과 맞바꾼 보험금을 타려는 인면수심의 부모를 막기 위해서다.      미성년자의 사망보험 가입 금지 조항이 문득 떠오른 건 최근 논란이 빚어진 이른바 ‘출산 대출 탕감’ 때문이다.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최근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출산 시 주택담보대출이나 전세자금대출 원금을 탕감해주는 방안을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목돈을 초저리로 장기 대출해주고, 출산한 자녀 수에 따라 원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탕감해주는 ‘헝가리 제도’를 응용해보자는 이야기다. 헝가리에서는 해당 제도가 나름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정책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주택 구입과 전세자금 마련 등에 어려움을 겪는 신혼부부가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출산을 망설이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다. 정쟁의 영역으로 밀려나 본질에 대한 논의는 휘발된 듯하지만 이 주장, 조금 과장해 말하면 무서웠다. 아이를 낳는 것이 빚을 갚기 위한 수단으로 치환되는 그 아찔함 때문이다. 탕감되는 대출액이 한 생명의 몸값으로 계산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선의의 발로였더라도, 이 주장이 내포한 위험은 여기에 있다.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원회 신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출산 대출 탕감과 관련한 대부분의 반응은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많은 정성과 노력과 에너지, 사회적 비용 및 경제적 비용 등을 감안한다면 대출 탕감 정도로 출산을 결심하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냐’가 주를 이뤘다. 모든 아이를 걱정 없이 키울 수 있는 사회 및 제도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는 판단이다. 그렇다면 출산 대출 탕감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정부도 관련 정책 기조와는 거리가 있다며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출산 대출 탕감’이 안고 있는 불온한 요소는 하나둘이 아닐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며 부모의 빚을 갚아주는 선물을 주는 자녀가 축복으로 여겨지며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을까. 지나친 기우일지 몰라도 ‘출산 돌려막기’라는 무시무시한 신조어마저 등장하지 않을까. 출산이 빚테크의 새로운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건 아닐까. 해서는 안 될 생각과 가정이 꼬리를 물게 됐다.    형평성 논란도 불거질 수 있겠다 싶다. 관련 기사에는 이미 출산한 경우는 어떻게 할 거냐, 불임 부부의 대출은 어떻게 되냐는 등의 댓글도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재난지원금 지급 당시 빚어졌던 혼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산 대출 탕감을 둘러싼 다양한 주장도 난무할 수 있을 터다.    저출산 문제 해결은 쉽지 않은 과제다.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나아지지 않는 상황만 봐도 그렇다. 극약 처방이 필요하단 생각에 출산 대출 탕감이라는 방안까지 고민했을 수도 있다. 정부의 선 긋기 등으로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더 두려운 건 이 논의나 제안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많은 그 어떤 선거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명목에, 어쩌면 다음에는 선뜻 출산 대출 탕감에 동의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밀려온다.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도, 성실한 채무자를 우롱하는 것이란 목소리에도 출산 대출 탕감까지 이어진 정치인의 ‘대출 탕감 카드’는 힘이 세기 때문이다.  아이의 탄생이 대출 탕감으로 이어지는 논리의 흐름은 지금이야 소름끼치지만,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둔감해지기도 쉬운 법이다.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2023.01.13 00:49

  • [서소문 포럼] ‘I See You’가 사라진 세상

    정현목 문화부장 영화 ‘아바타: 물의 길’(아바타2)이 새해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다. 인류의 생존 기반인 바다를 훼손해선 안 된다는 생태적 메시지가 좋았지만, 영화 속 ‘I See You’란 대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전편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와 외계종족 네이티리 사이에 이해·포용의 징표로 사용된 이 대사는 2편에선 부족 간 소통은 물론 해양동물과의 교감으로까지 확장됐다. 해양부족 여성은 암컷 툴쿤(고래를 닮은 해양동물)과 오랜만에 만나, 눈을 바라보며 모성(母性)에 대해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제이크 설리의 둘째 아들 로아크와 외톨이 툴쿤 파야칸의 교감 또한 눈을 통해 이뤄진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지난달 일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시리즈를 관통하는 대사 ‘I See You’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을 본다’는 단순한 지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존경·인정 등 다양한 뉘앙스가 함축돼 있다. 사랑이라는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아바타’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모두 지능과 감정을 가진 생물체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그리려 한다.”     ■  「 영화 ‘아바타’의 핵심 ‘I See You’ 사람들은 눈으로 이해·교감·연결 친구보다 스마트폰에 빠진 우리 마음 터놓는 소통은 불가능한가 」    영화 ‘아바타2’에서 주인공이 해양동물과 눈으로 교감하는 장면.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타인과의 소통은 눈을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한다는 뜻이다. 아프리카 줄루족은 ‘사우보나’(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인사에 ‘응기코나’(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화답하는데, ‘I See You’가 여기서 착안한 대사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서 자못 궁금해졌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과 버스에선 사람들이 모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게 흔한 풍경이 됐다. 식당에서도 동료들끼리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대화는커녕 각자 스마트폰을 보는 게 이젠 놀랍지 않다. 어떤 모바일 키오스크 서비스는 “종업원 눈을 마주치며 음료 주문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냐”는 광고까지 냈다. 눈 마주치는 건 고사하고 통화도 불편하다며, 메신저로 용건을 알려 달라는 젊은 직원도 수두룩하다.   “수업 시간에 조별 토론 준비를 시켰더니, 학생들이 아무 말도 않고 메신저 단체대화방을 만들어 거기서 의견을 나누고 있더라”는 어느 대학교수의 경험담은 젊은이들 사이에 눈을 마주치지 않는 소통이 얼마나 평범한 일상인가를 극명히 보여준다.   김범석 교수(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는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두 줄로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메신저 단톡방으로 토론하는 의대생들이 장차 어떤 의사가 될지 두렵다”고 적었다. 스마트폰과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환자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의사가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그의 걱정에 마음 한구석이 갑갑해진다.   눈 마주침이 사라진 건 취재 현장도 마찬가지다. 속보 경쟁 때문에 취재원의 코멘트를 받아치느라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기자가 많다. 취재원과 기자가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심도 있는 질문과 답변이 오가기는 힘들다.   영화 ‘인터스텔라’(2014) 개봉 때 한국 기자들과 만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자신의 답변이 통역을 거치는 시간에 그림 한 장을 그렸다. 기자들이 타자수처럼 노트북에 그의 말을 받아치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였길래 그림까지 그렸을까. 외국 배우·제작진이 내한할 때, 국내 관계자들은 “한국 기자들은 질문하는 짧은 시간을 제외하곤 답변을 곧바로 노트북에 타이핑한다.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거나, 대화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라고 미리 당부한다고 한다.   눈과 얼굴을 거치지 않고도 소통과 업무에 별 지장이 없는 시대다. 이제 비대면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하지만 상대방과 눈빛을 주고받는 행위가 인간다움의 필수 조건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서로 눈을 바라보며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관계 맺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아무리 채팅 앱 기능이 발전한다 해도 대화 중 오가는 눈빛과 표정의 변화, 미간과 동공의 움직임, 목소리 톤, 숨소리 등은 기계적 신호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런 무언의 메시지가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눈 마주치는 걸 부담스러워 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다가 결국 정서적 소통과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퇴화하는 세상이 오지는 않을까. 칭얼대는 아이를 어르지 않고 스마트폰을 떠안기는 부모가 많아지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세상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정현목 문화부장

    2023.01.10 00:52

  • [서소문 포럼] 프랑스 축구, 블랙핑크의 공통점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레 블뢰(Les Bleus)’ 는 역시 멋졌다.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했던 프랑스 축구대표팀 이야기다. 킬리안 음바페의 돌파, 앙투안 그리스만의 드리블, 오렐리앵 추아메니의 패스는 말 그대로 ‘아트 사커’였다. 화려한 개인기는 기본, 세밀한 패스에 탄탄한 조직력까지 더하니 축구가 아름답다. 우승은 아르헨티나가 차지했지만, 승패를 떠나 프랑스 축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프랑스가 축구 강국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밑거름이 됐다. 잘 알려진 대로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이나 다름없다. 프랑스는 1988년 국립 축구연구소를 만들었다. 유소년 양성 기관이자 대표팀 훈련 장소인 클레르퐁텐이다. 축구 영재를 육성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종주국이라고 뽐내는 영국을 꺾기 위해서 클레르퐁텐을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다. 시설은 5성급 호텔급인데 분위기는 대학교 기숙사 같다. 축구 스타 티에리 앙리가 바로 클레르퐁텐 출신이다. 차세대 축구 황제로 떠오른 음바페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공을 찼다. 축구 영재에 대한 과감한 투자는 세월이 흐른 뒤 결실을 보았다. 앙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조국 프랑스에 우승 트로피를 바쳤다. 음바페는 카타르 월드컵에서 골든부트(득점왕)를 차지했다.     ■  「 피부색 따지지 않는 프랑스 대표팀   K팝 그룹도 외국인 적극적 영입 국적과 혈통 따지는 건 시대착오적 축구도 문화도 대세는 하이브리드  」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한 프랑스 축구대표팀. 아프리카계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런데 프랑스 대표팀엔 ‘순수’ 프랑스 국적 선수가 많지 않다. 카타르 월드컵 26명의 대표팀 엔트리 중 프랑스 단일 국적자는 8명뿐이다.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복수 국적자다. 국적이 아닌 피부색으로 따져보면 이게 정말 프랑스 대표팀 맞나 싶다. 특히 선발 라인업엔 아프리카계 선수들이 주류를 이룬다. 공격수 그리스만과 골키퍼 위고 요리스를 빼면 모두 피부색이 검다. 프랑스 대표팀이 아니라 아프리카 올스타팀이라 부를 만하다. 공격수 음바페는 아버지가 카메룬, 어머니가 알제리 출신이다. 그래서 국적이 세 개인 3중 국적자다. 추아메니는 부모님이 모두 아프리카 카메룬 출신이다. 현역 선수뿐만 아니라 역대 프랑스 축구대표팀에도 흑인 선수가 한두 명이 아니다. 당장 프랑스의 축구 레전드 지네딘 지단은 알제리계다. 티에리 앙리도 이민 가정 출신이다.   백인 선수라고 해서 모두 프랑스 혈통인 것도 아니다. 그리즈만은 아버지가 독일계, 어머니는 포르투갈 출신이다. 골키퍼 요리스는 스페인계다. 프랑스와 스페인 이중국적이다. 이런 경우는 끝도 없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축구 스타 미셸 플라티니는 이탈리아 이민 가정 출신이었다. 이쯤 되면 국적과 혈통, 피부색을 구분하는 게 난센스요, 시대착오적이다. 그래선지 플라티니는 이렇게 말했다. “축구에 인종이란 없다. 어설픈 백인들만 흑인을 차별한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축구대표팀 구성을 놓고 말이 많다. 그래도 프랑스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자유를 중시하는 분위기에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프랑스 특유의 톨레랑스 문화도 한몫했다. 관용과 아량, 포용을 뜻하는 단어가 바로 톨레랑스다. 국적과 피부색이 달라도, 때로는 종교가 달라도 보듬겠다는 것이다. 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패스, 창의적인 플레이로 골을 만들어내는 아트 사커는 바로 톨레랑스의 산물이다.   결국 대세는 하이브리드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요소를 둘 이상 뒤섞는다는 뜻이다. 하이브리드는 축구에만 적용되는 덕목이 아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하이브리드가 사회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자동차는 하이브리드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다. 내연 기관(석유)과 전기모터(배터리)를 적절하게 혼용한 결과 연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골프도 하이브리드 시대다. 아이언과 우드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클럽이 위력을 발휘한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자신을 ‘코카블래시안’으로 칭한다.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의 혼혈이란 뜻이다.   이뿐인가. K팝 그룹 중엔 순혈주의를 버리고 외국인 멤버를 받아들인 팀이 한두곳이 아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블랙핑크가 대표적이다. 잘 알려진 대로 리사는 태국 출신, 로제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성장한 이중 국적자다. 굳이 프랑스 축구대표팀과 블랙핑크의 공통점을 꼽자면 하이브리드 팀을 만든 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최고의 가치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하이퍼 커넥트 시대에는 결국 세계와 교류하면서 소통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축구 대표팀을 이끌 지도자가 외국인 감독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제원 스포츠 디렉터

    2023.01.06 01:26

  • [서소문 포럼] 한 입으로 다른 말 하지 않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북한 무인기의 위험성은 어제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4월 한 예비역 장성을 만났을 때 들었던 가상 시나리오다.   ‘동해안 해군 유류 기지에 돌연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처음엔 사고인지 피격인지 알 수 없었다. 군 당국의 조사 결과 북한 무인기의 자폭 공격이었다. 잔해도 발견됐다. 하지만 조사 결과 확정까지 며칠의 시간이 걸리며 대북 응징의 시간을 놓쳤다. 또 조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선 “북한 무인기 맞나. 믿을 수 없다”며 논란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가해자인 북한은 적반하장으로 남조선의 전쟁 기도에 선제공격을 하겠다며 한반도를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결론=남한은 두드려 맞고도 내부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고 오히려 북한이 협박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지 8개월 만에 서울 하늘이 뚫렸다. 국민은 어이가 없다.     ■  「 민주당, 북 무인기 침투 질타하며 “안보는 장난 아니다” 연일 맹공 핵 위협은 무인기보다 훨씬 엄중 한·미 연합훈련에 딴지 안될 말 」    북한 조선중앙TV가 1일 공개한 화성-12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북한은 2017년 화성-12형을 첫 시험 발사했는데 6년이 흐른 올해에는 이 미사일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무인기가 활개 치는 사태를 막으려면 평소에 대비해야 한다. 예산 우선순위 범위에서 장비를 갖추고, 상시 훈련을 해야 한다. 물론 무인기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무인기는 동체가 작은 데다 저고도로 날아다녀 레이더에 간헐적으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무인기와 비슷하게 점으로 나타나는 새떼에 기총 사격을 하지 않으려면 직접 가서 눈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또 민가를 배경으로 기총 사격을 하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군의 해명은 여기까지다. 탐지와 격추가 어렵다고 군이 실패의 책임을 면제받을 권리는 없다. 전쟁이 벌어지면 패자에게 두번째 기회는 없다. 레이더에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전을 용서받지 못한다.   민주당은 정부와 군에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이런 대통령에게 국군 통수권을 계속 맡겨야 하는가” “정신줄을 놓은 정부, 안보가 장난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맞다. 민주당 비판대로 안보는 장난이 아니다. 정부와 군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평소 대비가 필요하다. 꼼꼼한 탐지 체계와 발견된 무인기에 대한 요격 체제를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비상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왕좌왕하지 않고 실시간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게 평시 훈련이다. 국가 안보건 개인 삶이건 같다. 평소에 준비 없이, 노력 없이, 땀을 흘리지 않고 살다가 상황이 닥쳤을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건 웃기는 사고방식이다. 나랏일이건 개인사에서건 공짜를 기대하고 살면 미래가 없다.   2015년 8월 북한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문제 삼아 전쟁 협박을 했다. 이른바 ‘인민군 전선사령부’가 “전 전선에서 전면적 군사행동을 개시한다”고 위협했다. 당시 군은 일전불사를 각오했다. 전쟁에 대비해 전방 부대에서 후송 가능한 민간 병원들의 혈액 재고량까지 확인했다. 이런 물밑 대비가 없이는 싸울 생각을 말아야 한다.   대북 대비에서 가장 대규모이며 가장 직접적인 훈련은 한·미 연합훈련이다. 무인기 대비는 국지 타격 대처용이지만 연합훈련은 한반도에서 북한 도발로 벌어지는 전면전을 상정한 최상위 훈련이다. 평소 북한 무인기를 막기 위해 훈련하는 게 당연하다면 북한의 핵 공격과 지상군 남침, 특수부대 침투 같은 전면전에 대비한 훈련은 더욱 당연하다.   민주당은 이번에 무인기의 서울 침입을 맹비난하며 안보 무능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여줘야 마땅하다. 무인기에 뚫린 대비 태세를 “안보 참사”로 질타하면서 “북핵 전면전 대비 연합훈련은 안 해도 된다”고 주장한다면 자기모순이다. 연합훈련을 유예하자며 소속 의원들이 연판장을 돌리는 행동이나,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연합훈련을 하지 말자는 무책임한 주장은 국민 앞에서 삼가야 한다. 이른바 진보 단체들이 미군 철수, 연합훈련 중단을 외칠 때도 민주당은 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게 “안보는 장난이 아니다”며 맹공하던 태도와 결이 일치한다.   북한은 새해 벽두부터 ‘기하급수적 핵 전력 증강’을 선언했다. 지난 민주당 정부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나들고, 도보다리를 함께 거니는 ‘감동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보여줬지만, 2023년 1월 1일 재확인한 건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일도’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무인기보다 백배 천배 위험한 북핵에 대해 최소한 무인기 대비에 준하는 안보 중시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한 입으로 다른 말을 하면 안 된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2023.01.03 00:43

  • [서소문 포럼] ‘눈빛 친구’를 아시나요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아, 이렇게 생기셨구나….”   후배 여기자와의 1년 전 점심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난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 4인 식사가 허용돼 마련한 자리였다. 재기발랄한 15년 후배는 사실상 처음 대면하는 부장이 마스크를 벗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외모 평가’를 하고 말았다. 민망했는지 “얼굴을 처음 뵙는 거라…잘, 생기, 셨네요”라고 수습을 했다. 카톡과 전화로 수개월 동안 지지고 볶았던 선후배였건만, 대면의 순간엔 ‘코로나 디스턴스’를 절감했다. 이후 퇴사해 행복하게 사는 후배의 추억 속엔 마스크 쓴 아재의 눈빛만 남아있지 않을까.     ■  「 눈빛으로만 사람과 접하고 당연한 것 못 누린 아이들 코로나 이후 각별히 챙겨야 」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에서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모습. [뉴스1] 돌이켜보면 지난 3년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식당에 가려면 체온을 재야 했고 QR코드로 백신 접종 인증을 했다. 마스크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선 기억은 이제 까마득하다. ‘마기꾼(마스크+사기꾼)’으로 몰렸다는 분노, 마스크 벗는 게 팬티 벗는 것처럼 부끄럽다는 하소연은 처절했다.   요지경 세상에 ‘해방’의 여명은 밝아온다. 방역 당국은 일정 조건(주간 확진자 2주 연속 감소, 위중증·사망자 감소, 4주 내 중환자 병상 가용능력 50% 이상, 고령자 등의 접종률 상승 중 2가지 충족)이 되면 실내 마스크 의무를 해제하겠다고 했다. 새해 1월이면 ‘그날’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더 빨리 해제하자는 여론, 의무가 아니어도 계속 마스크를 쓰겠다는 신중론이 교차한다.   마스크에서 벗어나면 영화 속 시간여행자처럼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포스트 코로나가 코로나 이전과 비슷할 것이라는 기대는 접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 기대는 살아온 세월이 넉넉한 아재들의 근시안일 공산이 크다.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라. 어른들에게 당연했던 추억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지. 코로나 3년에 휩쓸려 뒤틀린 삶의 패턴은 차고 넘친다. 올해 재수종합반 생활을 한 내 딸과의 일화도 그중 하나다.   “친구는 좀 사귀었니? 아빠도 재수할 땐 동병상련하는 학원 친구들이 힘이 되더라.” “학원에서 대화하면 벌점이야. 눈빛으로만 알고 지내는 거야. ‘눈빛 친구’랄까?”   모든 재수생이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코시국의 재수학원은 어느 때보다 싸늘했던 것 같다. 마스크는 안전을 명분으로 학업을 옥죄는 수단이 됐다. 매일 만나면서도 한 번도 이름을 불러본 적 없는 애매한 관계, 눈빛 친구가 그렇게 탄생했다. 재수 우정을 30년 넘게 나누는 아빠에겐 생소한 풍경이다.   그보다 어린 ‘코로나 베이비’들에겐 눈빛 친구조차도 부러운 일상일지 모른다. 팬데믹이 영유아의 발달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때문이다. 이화여대 아동발달센터가 올해 7월부터 3개월 동안 서울 마포구·서대문구 육아종합지원센터와 협력해 만 2살(2019년도 출생) 아이 545명의 발달선별검사를 해봤더니 18.34%(100명)가 발달 지연이 의심됐다고 한다. 코로나19 이전의 유사한 검진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조사를 진행한 이화여대 아동발달센터 김선경 부소장은 “검사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코로나19 이전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면서도 “발달 지연 의심 18%는 일반적으로 나오기 어려운 높은 수치”라고 걱정했다. “영유아는 또래 혹은 성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언어발달이 이뤄진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어린이집을 안 갈 땐 또래 간 교류가 줄었고, 키즈카페·놀이터 등에서 마음껏 뛰놀며 다양한 경험을 해볼 기회도 제한됐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눈만 보이고 표정을 알 수 없는 생활을 했다. 검사자들도 정서적으로 낯을 가리는 아이가 예년보다 눈에 띄게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고 김 부소장은 설명했다.   김 부소장은 “마스크 때문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고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코로나 베이비가 처한 현실은 걱정스럽다고 했다. 감정적 공감 방식을 미처 배우지 못한 채 눈빛만 보는 삶을 살고 있어서다. “눈만 보고는 사람의 희로애락을 알 수 없잖아요”라고 김 부소장은 안타까워했다. 대책을 묻자 “더 세심하게 보면서 발달을 도울 수 있는 교육과 보육을 고민하는 것 말고는 당장 마땅한 방법이 없다. 해외에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엔데믹에 접어들 새해에 우리는 마스크를 쓰느냐 벗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앞선 세대의 당연한 경험을 하지 못한 후세대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도 풀어야 할 과제다. 세월호를 겪고도 이태원을 놓쳐 피눈물을 흘리는 한심한 어른들이기에, 연말연시의 각오는 어느 때보다 각별해야 한다.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2022.12.30 00:46

  • [서소문 포럼] ‘그들만의 추억 쌓기’ 유감

      임종주 정치에디터 엊그제도 그랬듯 크리스마스와 정치가 주는 이미지는 아무리 곱씹어봐도 상극이다. 가족과의 정겨운 추억 쌓기와 시끌벅적 요란한 정치 세상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크리스마스는 곧잘 모진 정치의 세계와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이른바 빅 데이(big day)이곤 했다. 성탄절이라고 해서 정치가 가정으로 돌아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다. 33년 전 크리스마스가 딱 그랬다. 집집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1989년 12월 25일 동유럽 루마니아에서 급전이 타전됐다.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와 부총리까지 지내며 막후 권력을 휘두르던 부인 엘레나가 총살형으로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반체제 인사 축출 항의로 시작된 티미쇼아라(루마니아 서북부 도시) 촛불시위가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그 후 불과 열흘 만에 25년 장기 집권 체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부부의 처형 직후 끔찍한 모습이 그대로 TV 전파를 탔다. 명절 분위기에 젖어 있던 전 세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의 생전 연설 모습. [중앙포토]   ‘6만 학살자’로 낙인 찍힌 권력가의 비참한 말로는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됐다. 기억이론은 ‘차우셰스쿠 통치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따지기보다 ‘현재 시점에서 그 철권통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결코 되풀이돼서는 안 될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사회적 틀 안에서 끝없이 재생되면서 유지된다. 그렇게 형성된 집합기억은 거악의 재발을 억지한다. 티미쇼아라 출신 안드레이 우지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의 자서전’(2010)은 그 같은 기억의 존속과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틀의 하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중앙포토]   또 한 번 크리스마스가 들썩인 건 그 후 꼭 2년 만이었다. 그날 저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다. 크렘린궁에 나부끼던 붉은색 소련 국기가 내려지고 러시아 연방 삼색기가 새로 게양됐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고별 연설에서 “우리는 냉전이 종식된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고 선언했다. 20세기 격변의 세계사 그 중심에 섰던 개혁·개방의 상징 고르바초프는 올해 8월 오랜 투병 끝에 9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추모 메시지가 답지했고, 많은 사람이 고르비(애칭)를 회상했다. 정치학자 안병진은 중앙시평(9월 20일자)에서 “냉전 종식의 산파로서,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개혁가로서 전 세계는 그를 추억했다”고 썼다. 기억과 추억은 의외로 좋고 나쁨의 잣대로 쉽게 구별된다. 통념적으로도 냉정하고 차가운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기억은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회상 여행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모든 추억은 기억으로 수렴되지만 모든 기억이 다 추억이 되지는 않는다. 크리스마스의 두 정치인은 그렇게 기억(차우셰스쿠)과 추억(고르바초프)의 대상으로 갈라진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보다리 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기억과 추억이 공적 영역과 만나면 냉철한 분별력이 필요하게 된다. 4년 전 판문점으로 되돌아가 보자. 2018년 4월 27일 남과 북의 정상은 ‘도보다리 친교’라는 역사적 장면을 연출했다. 길이 50m, 푸른색 목교 위에서 펼쳐진 두 정상의 드라마틱한 산책과 담소 장면은 판문점 선언과 5·26 정상회담, 9월 평양 공동선언까지 숨 가쁘게 이어진 빅 이벤트의 신호탄이었다. 꿈만 같던 데탕트는 그러나 이듬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 충격으로 종지부를 향해 치달았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최근 사석에서 일련의 사건을 기억외교와 추억외교의 차이로 설명했다. “미국은 철저히 기록과 기억을 토대로 대북 문제에 접근(기억외교)한 반면, 한국은 판문점 회담을 추억으로 여겨(추억외교) 회담을 또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느 쪽이 국익을 최우선 가치에 두고 냉정한 기억과 치밀한 셈법에 충실했느냐가 성패를 가름했다는 것이다. 추억하기의 패착으로 읽힌다.   ■  「 불편한 기억만 남긴 2022 정치 국민에 즐거운 추억 선물 못해 지지층과 ‘그들만의 리그’ 몰두 」    옛 표현을 빌리자면, 무릇 정치의 정도는 사사로이 추억에 젖는 것을 경계하고 백성에게는 추억거리를 펼쳐주는 것이겠다. 지나간 시간을 반추해본다. 추억으로 삼을 만한 정치적 흔적이 어떤 게 있을까.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여든 야든 열성 지지층과 ‘그들만의 추억 쌓기’에 몰두한 탓이 크다. 그래서 남은 건 극단적 진영 갈등과 정치 양극화, 정쟁의 일상화다. 하나같이 불편한 기억들이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2013)에서 프루스트가 폴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속 대사처럼 ‘월드컵 16강 추억'의 홍수에 모조리 쓸려 보내고 싶은. 임종주 정치에디터

    2022.12.27 00:50

  • [서소문 포럼] 세밑, 이태원 풍경

    최현철 사회 디렉터 한 해가 끝을 향해 달려간다. 반짝 풀렸던 날씨는 다시 에일 듯 날카로워졌다.   22일 낮,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로 올라오니 코끝이 시큰했다. 매운 날씨 탓인지, 계단 벽에 촘촘히 붙은 메모 속 안타까운 사연들 때문인지 헷갈렸다.   20m 떨어진 해밀톤 호텔 옆 작은 골목길은 아직 썰렁했다. 행인들은 158명이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등진 현장을 피했다. 입구를 지키는 젊은 의경은 무표정했다. 3년 만에 마스크 없이 맞는 핼러윈 데이에 인파가 폭주할 것이란 예측에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경찰이 골목 진입을 조금만 막았더라면, 112 구조 전화에 조금만 더 성의있게 대응했다면, 그 시간 지하철이 이태원역을 무정차 통과했더라면… 짧은 순간에 부질없는 가정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좁은 골목 한쪽 벽은 사진과 쪽지, 마른 국화와 음료수병으로 빼곡했다. 이태원역쪽에 만들어진 공식 추모공간은 참사 52일만인 지난 21일 치워졌다. 15만명이 찾아와 2만5000 송이 국화와 1만여 개의 추모글, 2000여개의 추모품을 놓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골목벽에 붙은 추모품은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  「 참사 두달, 책임도 사과도 요원 유족 분향소 앞 보수단체 막말 갈등만 증폭되는 세밑 이태원 」    22일 오전, 이태원 참사현장이 발생했던 골목길 모습. 이태원역 근처 공식 추모공간은 치워졌지만 골목길 벽엔 여전히 추모물품이 남아있다. [뉴스1] 이태원역과 다음 역인 녹사평까지는 500m도 안되는 짧은 거리다. 녹사평역 조금 못미쳐 이태원 입구를 알리는 파란 아치 한쪽 끝에 지난 14일 시민분향소가 섰다. 천막을 잇대 하늘만 가린 공간에 유족이 동의한 76개의 영정이 놓였다. 그 속에 담긴 얼굴은 하나같이 밝고 젊어 처연함을 더한다. 참사가 없었다면 지금쯤 성탄을 앞두고 마음 설레고 있을 나이 아닌가.   분향소는 불교 제사의식인 49재를 이틀 앞두고 마련됐다. 죽은 영혼이 이 기간을 지나며 다음 생에 받을 인연이 정해진다 하여 7일마다 지내는 제례의 마지막 순서다. 종교를 떠나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남은 이들은 고인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묻고 일상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분향소 주변 풍경은 아직 그럴 준비가 안됐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일깨운다. 분향소 10m 앞엔 보수단체의 트럭과 텐트가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설치된 현수막엔 ‘지난해 사망 31만여명, 고독사 3378명, 교통사고 사망자 2916명’이란 수치와 ‘이런 사망도 국가가 책임지고 대통령이 사과해야 하느냐’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혀있다. 확성기가 없어도 대화 소리가 들리는 사실상의 한 공간에서, 유족들은 마주한 사람들로부터 매일 ‘2차 가해’를 당한다고 하소연한다.   당초 유족들의 요구는 진심어린 사과와 책임자 문책·처벌 정도였다. 대통령과 정부는 수사로 명백한 책임을 가리는 게 먼저라며 상징적인 인사 조치 요구도 뒤로 미뤘다. 그런데 경찰에 맡겨진 셀프 수사는 50일 넘도록 공전하고 있다. 그날 현장 책임자인 이임재 전 용산서장에 대한 구속영장마저도 기각됐고, 최근 영장이 재청구된 상태다. 그 윗선에 대한 수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렇게 죽도 밥도 안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유족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민변이 도왔고, 시민단체가 합류했다. 이를 빌미로 여권에선 막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의원, 당 비상대책위원, 심지어 윤핵관 원톱이라 자부하는 권성동 의원까지 나서 ‘자식 팔아 장사’ ‘참사 영업’ ‘시민단체의 횡령 수단’ 같은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 분향소 앞 살풍경엔 이런 사정이 얽혀있다.   책임을 가릴 또하나의 방편인 국정조사는 시한의 절반을 날렸다. 굳이 이 시점에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안을 통과시킨 야당의 헛발질 탓이 크다. 여당은 곧장 국조 보이콧을 선언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다. 논란 끝에 여당이 복귀했는데, 이번엔 야당 국조특위 위원이 참사 당일 본인이 근무했던 병원의 구급차를 타고 현장에 온 행적이 드러났다. ‘징계해야 한다’ ‘그럴 자격이나 있냐’는 날 선 공방 속에 진실규명 의지는 사라진 듯하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인상적인 풍경 하나를 보탰다. 그는 참사 직후 외신 기자회견에서 뜬금없는 농담으로 비난을 자초했다.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21일 예고 없이 분향소를 찾았다. 그런데 유족들이 정부의 제대로 된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자, 조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따라오는 취재진에게서 벗어나려고 빨간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고발당했다. 휘적휘적 길을 건너는 그의 뒷모습이 웃프다. 사과도 할 수 없고, 책임규명은 잘 안 되고, 갈등은 증폭되는 세밑 이태원의 스산한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 최현철 사회디렉터

    2022.12.23 00:46

  • [서소문 포럼] ‘R’ 폭풍이 몰아친다

    김창규 경제에디터 매년 11월 11일이면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 행사로 불리는 중국의 광군제가 열린다. 이 기간에 중국의 대형 쇼핑몰은 초 단위로 판매 실적을 알리는 전광판 쇼를 하곤 했다. 지난달 12일 0시를 기점으로 이 행사가 막을 내렸지만 중국 전자상거래업체는 14년 만에 처음으로 판매 실적을 내놓지 못했다. 중국의 소비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11월 소매 판매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9% 감소했다고 지난 15일 발표했다. 상하이 전면 봉쇄가 이뤄졌던 5월 마이너스 6.7% 성장했다가 6월부터 플러스로 바뀌었으나 10월(-0.5%)에 이어 또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경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중국은 지난 3년간 고수해온 ‘제로 코로나’에서 방역을 대폭 완화하는 ‘위드 코로나’로 서둘러 뱃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올해 경제성장률은 목표치(5.5%) 달성은 고사하고 지난해(8.1%)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3% 남짓에 불과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코로나19 규제 완화로 경제 활동이 자유로워지겠지만 감염자가 급증하며 생산과 소비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 중국과 미국 경제 침체 기미 완연 한국과 교역 규모 1, 2위인 국가 소비 감소폭 예상치 크게 웃돌아 혁신 통한 비용절감 등이 돌파구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중국의 방역 완화로 감염자가 급증하며 더 많은 노동자가 일시적으로 일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면서 중국의 올해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낮출 가능성을 내비쳤다. IMF는 지난 10월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올해는 3.2%로, 내년에는 4.4%로 예상했다.   여기에 중국 경제위기설도 다시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중국 가계 자산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부동산 시장이 1998년 이후 최악의 수준에 빠져 있는 데다 이 여파가 금융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환자까지 급증할 경우 중국 경제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 경제가 단순 감기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미국은 또 어떤가. 경제가 내년 상반기에 침체에 들어설 것으로 전문가는 예상한다. 특히 미국 경제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가 급감했다. 미국의 11월 소매 판매가 전달보다 0.6% 감소했다. 지난해 12월(-2.0%)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고 시장의 예상치(-0.2~-0.3%)를 크게 밑돌았다. 10월에 1.3% 증가하며 증가세를 유지하던 소비는 빠르게 하락세로 돌아섰다. 11월은 블랙프라이데이와 사이버먼데이 등 최대 쇼핑 대목이 있는 달이다. 그런데도 소매가 급감했다는 건 그만큼 소비 심리가 크게 나빠졌다는 방증이다.   그동안 미국인은 정부의 재정 부양 등에 힘입어 소비를 늘렸지만 연방준비제도(Fed)의 공격적인 통화긴축 등으로 지갑을 닫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6일(현지시간) 공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내년 미국 경제가 어떻게 될 것으로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52%가 ‘나빠질 것’이라고 답했다.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25%, ‘올해와 비슷할 것’이라는 응답은 18%였다.   새삼스레 중국과 미국 경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이들 국가가 한국의 1, 2위 교역국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경제 침체에 빠진다는 건 한국 수출이 직격탄을 맞는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성장 동력인 수출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수출은 10월(-5.7%), 11월(-14.0%) 두 달 연속 감소(전년 동기 대비)했다. 또 이달까지 무역적자가 이어지면 한국은 9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올해 말까지 누적 적자 규모가 500억 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말 4631억 달러에서 지난 11월에는 4161억 달러로 470억 달러 감소했다.   내년엔 전 세계에 ‘R(경기침체)의 공포’가 밀려옴에 따라 한국 경제에 더 큰 어려움이 닥칠 전망이다. 무역적자가 확대되면서 외환보유액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금리 인상, 물가 상승 등의 여파로 기업의 이익도 갈수록 쪼그라들 것이다. 일자리 감소도 불가피하다. R의 공포가 한국 턱밑까지 다가왔다. 정부건, 기업이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장마가 오는데 장마를 안 오게 할 방법이 우리 힘으로는 없다”며 “부실한 곳에서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국내에서 할 수 있는 부분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한 기업은 경기 침체기에 혁신을 통한 비용절감으로 돌파구를 마련한다. 정부에도, 기업에도 옥석을 가리는 시기가 왔다. 김창규 경제에디터

    2022.12.20 00:54

  • [서소문 포럼] AI가 한국 정치에 답하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미국의 인공지능(AI) 연구재단 오픈AI가 지난 1일 공개한 챗봇 ‘ChatGPT’는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 또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결과물을 뚝딱 만들어낸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글을 바로 작성할 수 있고, ‘탁구 게임용 파이선 코드를 만들어 달라’면 순식간에 게임 하나를 만들어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지금까지 육체 노동자의 일자리를 대체했던 로봇과 자동화가 이제 ChatGPT 같은 AI가 나옴으로써 데이터 분석이나 연구, 기사 작성 등 지식 노동자가 담당하던 일자리를 빼앗아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AI 개발이나 실행 등의 분야에서는 새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미래인 ChatGPT에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진영 대립을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을 물었다. 그러자 즉각 ▶정기적 만남과 대화를 통해 소통을 확대하고 ▶상대방의 시각을 존중하는 포용을 장려하며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제도를 만들며 ▶법의 지배와 사법·언론기관의 독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답변이 나왔다.     ■  「 미국 챗봇AI, 여야대립 완화 제시 “만나서 대화하고 상대 포용하라” 윤 대통령, 야당과 소통·타협해야 」    지난 11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 건의안에 투표하는 민주당 의원들. [연합뉴스] ChatGPT의 답변은 한국 정치 현실과는 맞지 않는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 정치가 얼마나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상태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야는 마주 달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대화와 타협 없이 상대방의 양보만을 요구한다. 합의 후 시동도 걸지 못한 ‘이태원 국정조사’와 예산안 합의 처리가 불발되는 등 국회 공전 사태가 길어지며 두 당에 대한 국민 시선은 싸늘하다. 여야 대치의 가장 큰 책임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 리얼미터가 지난 12일 발표한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긍정 평가는 38.4%지만, 부정 평가는 58.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부는 대통령이 이끌고, 의회는 야당이 이끄는 상황에서 양쪽은 극단 대립으로 국민을 불안에 빠트리고 있다. 윤 정부가 출범한 지 7개월밖에 안 된 상황에서 이렇게 반목하는 데 4년 5개월의 남은 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치의 핵심은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윤 대통령이 정치를 잘한다고 보기 힘들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집권 초반 높은 지지율을 보이다가 후반에 급락했다. 대선을 앞두고 집권당 의원들이 대선 주자에게 몰리며 대통령에 반기를 드는 모습도 많이 봤다. 윤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낮은 지지율에 빠져 있다. 지지율을 끌어올릴 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국정 운영 동력을 찾으려면 민주당과의 협력이 절실하다. 현재 검찰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대장동 사건’ 등으로 문재인 정권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정조준하면서 윤 정부와 민주당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잘못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으나 정확하고 신속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치 대립이 격화돼 국정 운영은 파행이 불가피하다. 문재인 정권이 오랜 끈 적폐청산의 부작용을 보지 않았던가.   윤 대통령은 노동시간 유연화와 정년 연장 등을 포함한 노동 개혁과 건강보험 급여와 자격 기준을 강화하는 건강보험 개혁을 추진하려 한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대부분 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이다. 민주당의 협조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또 미국의 금리 인상과 미·중 전략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내년 한국 경제는 힘든 시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가 정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한국의 앞날은 암담하다.   여야의 극한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진영의 우두머리가 아닌 국민 전체의 지도자라는 마음으로, 민주당 지도부를 만나 대화와 타협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은 권한의 상당 부분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국무총리를 민주당이 추천하도록 하고 실권을 주는 연립정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외교·안보와, 노동·건강보험·연금 개혁 등 핵심 의제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총리에게 위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진영 대결을 완화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윤 대통령이 임기 내내 진영 싸움에 휘말릴지, 아니면 핵심 의제에서 성과를 거둔 지도자로 평가될지는 그의 선택에 달렸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2.12.16 00:20

  • [서소문 포럼] 저금리 시대의 관성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그래도 경쟁률이 10대 1은 될 줄 알았는데….”   최근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단지의 청약 결과가 나오자 업계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둔촌 주공은 이른바 ‘강남 4구’에서 나오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었다지만 이런 상징성에 업계에선 내심 청약 열기의 부활을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1순위 청약 경쟁률은 평균 3.7대 1에 그쳤다. 2순위 청약에서도 일부 평형은 공급 가구의 5배인 예비 당첨자 수를 채우지 못했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의 1순위 경쟁률이 평균 164 대 1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전국의 미분양 주택 수도 어느새 지난해 말의 두 배를 훌쩍 넘겼다.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이 부쩍 매서워졌다. 기후변화가 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계절은 바뀌고, 겨울은 오기 마련이다. 우리 경제가 돌아가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이상 열기를 내뿜던 시장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기가 감돈다. 투자는 물론 소비도 빠르게 움츠러드는 모양새다. 목돈이 들어가는 내구제부터 차곡차곡 재고가 쌓이고 있다. 새 차를 사기 위해 늘어서 있던 긴 대기 줄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자동차 할부 금리가 10%대까지 오르면서 계약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  「 금리 한파에 경기 움츠러드는데   정치권은 정쟁 몰두, 정부는 느긋 ‘길고 혹독한 겨울’ 경고 외면하나 」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모두 돈값이 올라가며 벌어지는 풍경이다. 연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초저금리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2008년 금융위기로 시작돼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에 한 차례 수명이 연장됐으니 장장 14년 만이다.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초저금리가 이대로 굳어져 어쩌면 새로운 정상 상태(New normal)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이 모든 환상을 단숨에 깨버렸고, 저금리의 종언은 현실이 됐다. 문제는 속도다. Fed가 ‘자이언트 스텝’을 성큼성큼 밟고, 한국은행이 보조를 맞추는 사이 우리 경제의 성장률 전망치는 뚝뚝 떨어지고 있다. 올해 2% 중반에서 내년엔 1% 초반으로 급전직하할 것이란 게 투자은행(IB)들의 예상이다.   이처럼 환경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 경제 주체들도 적응이 쉽지 않다. 틈만 나면 널뛰는 증시가 이를 대변한다. 지난달 말에도 제롬 파월 Fed 의장이 꺼낸 긴축 속도 조절론에 글로벌 증시가 한 차례 뜀박질했다. 하지만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에서 보폭을 좀 줄여봐야 빅 스텝(0.5%포인트)이다. 게다가 물가 안정을 위에선 ‘더 오랫동안, 더 높은 수준’으로 금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이런 현실 자각에 증시는 금세 고꾸라졌다. 그러자 월가에선 오랜 상승 랠리에 미련을 못 버린 투자자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는 분석이 나왔다.   저금리 시대의 관성에 젖어 일종의 ‘인지 부조화’ 증상을 보이는 곳은 또 있다. 불안해하는 시장을 앞장서 안심시켜야 할 정치권과 정부다. 내년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란 경고에도 국회는 여전히 정쟁에만 몰두 중이다. 예산안의 법정 처리 시한을 훌쩍 넘기고도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규제를 풀고 세금 부담을 낮춰 투자와 일자리를 살려보자는 법안들 역시 표류를 거듭한다.   경제를 볼모로 힘자랑하는 거대 야당의 오만이 볼썽사납다는 건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의 대응 역시 지나치게 느긋해 보인다. 이른바 ‘레고 사태’로 파문이 일고, 채권 시장이 흔들리는 데도 금융당국의 대응은 한참 늦었다. 또 가계를 향해선 빚을 줄이라면서도 시장에 부담을 주는 한국전력공사의 빚덩이를 해소할 근본적인 방안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저금리 시절이던 지난 정부에선 수많은 정책적 시행착오를 ‘퍼주기’로 메우며 그럭저럭 버텨 나갔다. 넘쳐나는 돈이 충격과 마찰을 흡수하는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번 정부에선 그런 행운을 기대하긴 어렵다. 완충재가 사라진 시장에선 조금만 삐끗해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파열음은 증폭된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길 바라는 시장을 향해 파월 의장은 “고통 없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고 일찌감치 못을 박았다. 이제는 길고 고통스러운 겨울이 올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부터 저금리 시절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2022.12.13 00:58

  • [서소문 포럼] 올려라 내려라… ‘관치금리’ 시대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연 6.5%면 피크(정점)야. 더 못 올라가. 여기서 꼭 가입해야 해.”  “지금은 경쟁이 붙어서 이렇게 빨리 오르는 거지. 이렇게 빨리 오르기 힘들어요.”  “이렇게 빨리 오르다가 언제 또 금리를 내릴지도 모른다니까.”    저축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연 6.5%를 기록했던 지난 10월 말.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한 저축은행 복도에서 치열한 ‘금리 대토론’이 벌어졌다. 토론 참가자는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 다섯 분. 이곳의 정기예금에 가입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던 이들은 경제와 금리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쏟아냈다. 현장 취재를 갔던 기자가 전해준 광경이다.    심지어 한 어르신은 옆자리에 앉은 기자의 손에 번호표를 쥐여주며 “나는 이미 옆(에 있는 저축은행)에서 연 6.1% 상품에 가입했어. 6.5%보다 더 높게 받긴 힘드니 아가씨도 지금 해야 해”라며 번호표를 양보했다고.    그때 저축은행 오픈런에 나선 이들이 맞았다. 지난달 24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올해 마지막 기준금리 인상분(0.25%포인트)까지 반영한 금리에 예금을 넣겠다며 계산기를 두드리며 나름 합리적 판단을 했던 이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시장금리도 오른다는 합리적 판단이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오판이 빚어진 건 서슬 퍼런 금융당국의 기세란 변수를 예상치 못했던 탓이다. ‘관(官)’의 기세가 등등한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패착이다. 역시, 이 땅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견뎌온 어르신들의 촉은 남달랐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동물적 감각이다.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수신금리 경쟁 자제를 당부하면서 주요 시중은행에서 연 5%대 예금 금리 상품이 사라졌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서울 시내 한 은행에 걸린 정기예금 금리 안내문. [연합뉴스]  ‘관치 금리’의 시대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5일 “금융권의 과도한 자금 확보 경쟁은 금융시장 안정에 교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과당 경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지난달 24일 “수신금리 과당 경쟁에 따른 자금 쏠림이 최소화되도록 관리·감독을 강화해 달라”고 했다.      은행으로의 자금 쏠림이 야기하는 ‘돈맥경화’와 예금금리 상승에 따른 대출금리 오름세를 막기 위한 금융당국의 궁여지책성 경고지만, 금융당국 수장의 잇따른 ‘수신금리 인상 자제령’에 시중은행은 재빠르게 몸을 낮췄다. 이내 연 5%대 정기예금 상품은 자취를 감췄다. 저축은행 금리도 내려갔다. ‘파킹 통장’ 등에 돈을 넣어놓고 예금금리가 더 뛰길 기다렸던 이들만 황당할 지경이다.    금융당국이 대놓고 예금금리 조정에 나선 게 처음은 아니다. 시곗바늘을 반년 전으로만 돌려도 금융당국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예금금리를 올리라고 은행의 등을 떠밀었다. 그 수단으로 구사한 것이 지난 7월 처음 도입한 ‘예대금리차 공시’다.      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를 공시하며 줄 세우기를 했다. 은행들이 이자 장사로 막대한 이익을 낸다는 여론에 기댄 압박이었다. 각 은행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 결과 ‘1위가 될 수는 없어’를 향한 은행들의 치열한 눈치작전이 벌어졌다. 예금금리를 끌어올려야 했다. 그런데 이제 예금금리를 낮추라는 정반대의 주문이 몰아친다. 당국의 오락가락 주문에 은행은 난감하다.       은행의 예금(수신)과 대출(여신) 금리를 결정하는 데 시장 상황보다 금융당국의 심기가 중요한 변수가 됐다. 금융당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관치 금리’가 시장의 가이드라인이 된 모양새다.      ‘관치 금리’의 등장에 한은도 난감할 수 있다. 기준금리를 올리면 시장금리는 따라 오르기 마련이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하는 이유다. 하지만 한은이 지난달 24일 기준금리를 연 3.0%에서 3.25%로 0.25%포인트 인상했지만, 예금금리는 오히려 역주행했다. 통화정책과 엇나가고 있다.      ‘관치 금리’가 시장을 지배하면 한은 금통위의 기준금리 결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볼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금통위원들도 금리 인상에 따른 가계와 기업 등의 이자 부담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어차피 금융당국이 시장금리를 적정 수준으로 지켜줄 테니 당국의 입만 바라볼 판국이다. '관치금리의 역설'이다.    금리는 경제와 시장의 온도계 역할을 한다. 과열과 냉각의 수준을 가늠할 지표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개입은 시장 왜곡을 빚을 수 있고, 정부의 실패로도 이어질 수 있다. 온도계의 오작동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가능하면 손대지 말라는 가격에까지 손을 뻗는 금융당국의 “금리 올려, 금리 내려”가 더 큰 위험의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2022.12.09 00:32